2004년4월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14-28
주와 함께 모으는 자
조금은 오래된 영화 중에 어떤 한 아이가 혼자서 집을 지키는 가운데 도적들을 물리치는 코믹(comic)한 내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상적 각색되어진 것과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달리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통제하고 성숙시키며 경영해 나가는 것으로 자신을 세우는 일로써 분명히 해야 할 것과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삶에 아름답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 사람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실제의 통제적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한 삶의 경영에 대한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그러한 측면의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는 가운데서 열려진 가능성에 의미를 두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지만 그것의 소중함이 일반적으로 장려되어지고 그러한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만, 한정되어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무한히 열려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경험한 가운데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지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실제를 그러한 상대적 의미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임의적으로 실제의식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그 절대의 보편적 승인으로써의 상대적인 무한이라는 것에 본질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며 그러한 혼돈을 벗어나 실제의식을 가질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실재의 사실들을 통해 주의 자녀들로서의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을 세울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내용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니 사람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비방하고 있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특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에 대하여서 실상은 그렇지 않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과 주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를 반대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임에 대하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바를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함에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5절과 1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벙어리귀신을 내쫓으심에 대한 비방으로써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시험하는 표적에 대한 질문을 다 같이 주목하도록 하는 본문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 가지 중에 한가지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먼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강하다’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언어로서 상대적인 측면의 의미와 실재의 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정되어진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지고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항상 그 강함의 실재가 합당하게 존재하는 그러한 말은 아닌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한 자’라는 뜻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 ‘엘로힘’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지기도 하고 또한 이 말은 애굽의 신들이라고 하는 말에도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감안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 강한 자라고 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힘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운데서 신격화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출애굽기에서 읽게 되어지는 ‘여호와’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써 스스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적 정당함과 절대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로서의 엘로힘, 즉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강한자는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의 강한자라는 존재로써의 신들이라고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심이 정당한 것입니다.
이방의 신들이 강한 자로 묘사된다고 하여도 자기 존재하나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대적인 신일 수밖에 없다고 함에 그들의 존재는 절대의 존재자 앞에서 자기 존재의 부인을 당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서 벙어리 귀신 들린 자가 나간 이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교회의 권세의 모습에서 이미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서 자신을 세우고 그 존재의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그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말함에 결국은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통한 분쟁과 나누어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의 함께하는 자가 아니라면 상대적인 것의 비교우위를 위해서 결국은 나누어지게 되어지는 자리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지며 이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을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정당함에 따른 실제의 의식을 가지는 것이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구별적인 차이와 그에 따른 분리적 모습으로 교파와 교단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적인 통일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견적인 눈으로 보이는 형태적인 것만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예수님 안에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전히 주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로서 헤치는 자의 모습으로써 규정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마리아가 복이 있으며 그를 숭배의 자리에 서게 하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말씀하심의 실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외식으로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함께 하는 자요 주와 함께 모으는 자의 모습이며 이는 자존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존재와 삶과 인식으로써의 믿음의 정당함을 찾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근거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은혜로 주의 말씀의 실재를 인정하고 따르지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 어떤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지고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된다면 이는 귀신이 나왔던 그 집이 소제되어진 것으로 귀신들이 인식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강함이라고 함만 생각하고 상대적인 강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와 같이 넘어짐이 심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여러 가지 사실로 하나님을 부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에 넘어지지 않게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그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으로써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나타내실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는 것과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그러한 중심에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주와 함께 모으는 자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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