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4월7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8:1-25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존재의 기쁨으로써 사람들이 그 자신의 존재를 경영하는 가운데서의 주어지는 분복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순전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쟁취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며 또한 본래적으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인식이 확산되어진 것도 옳지 못하면서도 현상적인 사실로써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옳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 그 전제가 되어지는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고민하게 되어지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기쁨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증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가운데서 그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크게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빌립의 전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나가고 중풍병자들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인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성에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믿고 세례를 받음에 따라서 큰 능력도 나타남을 보고 놀라고 있음과 이후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시몬은 하나님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그러한 가운데서 베드로의 책망을 들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고 그러한 말에 대한 것의 철회와 두 사도들의 증거가 계속되어짐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의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을 기억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언급한 두 가지 중에 먼저 ‘큰 자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기쁨을 주목하는 자들의 모습들과 그 악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이라는 바울을 가르치는 말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있는 성에 있었던 시몬도 자칭 큰 자라는 입장과 백성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 인생의 존재적 경영과 그에 따른 주의 증거’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행하는 자의 모습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소신 있게 배척하고 있는 지혜롭지 못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비록 잘못된 가운데서의 소신 있는 학문적 기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정황적 차원에서 동의해줄 수도 있는 여지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자들의 입장은 주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베드로의 책망이 있게 되어지는데 정작 시몬은 그 책망자체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기를 구하라고 함으로써 그 중심을 드러낸 것의 평가를 의식하는 정도에 이르렀고 사울은 그러한 판단의 책망을 받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나중에 그러한 회개의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를 입었던 것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열두제자들도 주님과 함께 가다가 누가 큰가 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부모에게 찾는 것과 같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임을 가르쳐주셨던 것과 같은 문맥적 정황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큰 자의 논쟁에 의미적 실제가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자리에서는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라는 주의 구원의 기쁨이라고 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은혜가 없어 단지 청함을 받은 자의 모습으로 일관할 뿐 주의 택한 백성으로써의 실제적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성에 있게 되어지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울음의 기숙과 오리라한 기쁨에 대한 증거의 연속성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주목하겠습니다.
참으로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때에는 삶의 경영이라고 함과 그에 따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그러한 슬픔을 현실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짐으로 그 전파되어지는 그 곳에 주의 구원을 인한 큰 기쁨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사울로서 칭하는 자리에 섰을 때에 마땅하게 생각한 것에 대하여서 의식하며 주의 증거를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의 열매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을 회심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덧없음과 평가절하 되어진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 고통스러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라는 것은 그 결실이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성에 큰 기쁨의 근원이 되어지는 주의 택한 백성들의 그리스도를 좇음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현실적인 실제와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와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는 스데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세상이 인식하지 못하는 주 안에서의 기쁨의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구원받은 자들로써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기쁨을 낚는 자들로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듯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심의 말씀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위성으로써 주께서 주신 내 마음에 소원하는 마음에 주신 은혜로써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며 더욱 항상 기쁨과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잊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이라고 함을 경영하는 것을 접으려고 하는 일들이 있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는 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님을 말하게 됩니다.
진정한 실제의 의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회의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경영에서 기쁨을 빼앗기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든지 아니면 기쁨이 상실되어진 가운데서 노예적인 개념으로 일관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과 우리의 삶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따른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 기쁨을 상실해야 한다는 강요적 정황을 만날 때에도 기도할 수 있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삶의 실제를 분별하며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 주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고통 속에서도 참된 기쁨을 길러내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송하는 자리에 들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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