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3월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4:32-37
발 앞에 둔 재물(財物)
요즘은 사회적으로 여러 방면으로 볼 때에 탈 권위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새로운 권위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창출하는 그러한 진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러한 진통들이 객관성을 항상 가지는 것은 아닌 가운데서 여러 가지 주관적 권위 해석과 그러한 경험적 판단이라고 하는 자체가 재평가를 받는 그러한 형태를 띤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정립되어지지 않은 형태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라고 함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동반하게 됩니다. 굳이 포스트 모던과 같은 그러한 시각에서 주목하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 이전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러한 진통이 있어 왔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고 더욱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며 더욱 실제적인 분별이 필요한 권위와 상관된 말씀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6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의 사도들이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잡혔다가 놓임을 받고 담대히 주의 말씀을 증거하기를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모인 곳에 진동으로 나타나심과 그러한 하나님의 인증적인 측면에서의 실제를 받아들이게 되어진 주의 성도들은 재물을 주의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줌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요셉에 대하여서 그리고 그의 헌물에 대한 것을 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의 뜻에 대한 언급도 같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에 대하여서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권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정치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납세의 의무를 지닌 국민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도 언급 가능한 것이며 또한 소비자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열려진 서비스체계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러한 표현이 가능한 권위의 이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은 방향에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진 재물’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별적 의미로써 하나님의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께 드린 재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권적 주장이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다만 청지기로써의 대행적인 측면에서의 권세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면서도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 무엇이 실제적인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람들의 인식에 맡는 것이라고 함에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노력과 인위적이라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공인되어진 인식에서 받아들여질 때에 그 사실규정의 당위성이 있음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그러한 것을 전혀 배제하지 않지만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허락되어지거나 허용되어지는 일상적 정당함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왜곡되어진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구별된 실제로서의 상식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의 본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드려지는 구별적인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28장에 나타나고 있는 야곱의 서원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돌아가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다고 함을 말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 아바아버지의 집에 이미 왔음에 대한 증거로 한 장소를 구별하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드려지는 것으로써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드림에 대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자신이 주장할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중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함을 하지 않는다는 본문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바나바라고 하는 요셉 레위인의 헌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는 그 이름의 뜻이 권위자라는 뜻으로써 그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재물드림에서 주 앞에 재물을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합당한 주의 받으심의 권위가 있다는 것과 그 권위가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실제적으로 세워짐에 대한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동방박사들의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아기 예수께 드리는 모습과 상관성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며 이러한 것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증거로 교회가 받음에 대한 합당한 권위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그러한 권위에서 파생된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도덕적 차원에서 재물드림에 대한 것이 다음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들 발 앞에 둔 재물.. 오늘날에는 사도는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의 증거에 합당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교회의 질서에서 당위성을 입은 자들이 이러한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을 관리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하여서 헌금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의식이 없이 행하는 가운데서 그 드려진 헌물의 규모로 자신들의 위치나 섬김에서 권세적 개념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옳은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모르고 그것을 취하는 자들도 자신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롬 12:20)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아바 아버지의 집에 주의 택한 백성으로서 왔습니다.’라는 구원의 고백과 증거로써 십일조와 헌물을 주의 질서를 따른 자 앞에 두며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 받으심의 증거를 온전히 나타내시는 가운데 전혀 낯설지 않는 주 아바 아버지의 품에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들게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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