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3월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0:38-42
마리아와 마르다의 선택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어떤 문제나 사실에 대하여서 판단할 때에 여러 가지 사실로 구분하여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고 비록 구분되어지면서도 구분하지 않고 같이 생각해야 할 사실판단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나무를 생각한다고 할 때에 그 나무의 잎과 뿌리는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과 그러한 특징들이 구분되어져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에 화재가 남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는 그 잎이나 뿌리에 대한 것을 구분하여서 기술하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그 나무라고 하는 전체를 생각하여서 판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잎이 잘 마르고 떨어지는 그러한 종류의 나무라고 하면 화재에 더욱 심각성과 긴급성을 더 인식하도록 하는 강요를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의 판단이 나타나며 또한 증거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그 뜻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8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인도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기를 힘써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마르다 자신을 돕도록 예수님께 말씀드렸던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에 따른 주님의 말씀하심이 기록되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나 한 가지 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하였음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문맥상의 배경적 의미에서 파생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황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문맥적인 해석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의식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주의 비유의 말씀이며 또한 이것은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의 주님의 직접적인 측면의 말씀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심의 말씀을 행하라고 하심의 뜻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비유에서 증거의 실제적 가르침은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선한 이웃이며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 강도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지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치료할 이웃으로 받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야 하는데 선한 이웃으로 오신 주님께 대하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두 여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주님을 섬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여인의 섬김은 두 형태의 섬김으로 구분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는 자의 예배적 삶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섬김이라고 하는 그러한 부대적인 상황적 섬김이라고 하는 것들을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 예수께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의 예배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에 이 좋은 것을 선택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앞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이 두 여인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반정립 되어질 수 있는 구분적 입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 말씀의 역동적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서 하나님 앞에서 더욱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그러한 중심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빌리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중심이 있음을 주께서 의도하시면서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온전히 한 지체로서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나무와 같음을 의미하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냐 행함이냐 이것은 이분적인 개념으로 다툼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말씀하심 안에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 또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의 은혜가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특별하신 뜻하심이 있을 수는 가운데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뜻하심 안에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에 믿음과 행함은 같이 언급되어지고 그 상관성을 나누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같이 행함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믿음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 말씀하심에 대한 정당함을 찾는 것보다도 그렇게 행한다고 하면 현실적인 실제라는 판단 하에서 하나님의 실재판단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악함에 나갈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생각되어질 수 있는 믿음과 행함으로써의 봉사로서 주님을 섬기는 선한 이웃으로 구주로 오신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주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이 좋은 편을 선택하였음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물가에서 주님의 식사를 준비하려고 갔다 온 제자들에게 그 여인에게 증거하게 되어지는 그 복음을 인하여서 알지 못하는 음식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봅니다.(요 4:32) 이러한 것은 육신적 음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반적인 음식의 정체성만으로 주님의 받으시는 섬김의 정체성을 전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오늘 본문에서의 마르다의 입장보다도 마리아의 입장의 좋은 것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심의 의미를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같이 좋은 편을 선택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우리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가운데서 진정한 구주 예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며 주의 이름으로 받으신 바가 되어지며 주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세상에 선한 이웃이 되어 주의 구원을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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