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01, 2004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

2004년2월2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9:37-62
이 말을 귀에 담아두라

정보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하는 것과 그러한 것들 중에서도 그러한 정보를 선별하는 기술과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것들 자료를 보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보존되어지는 그러한 정보들 중에서도 ‘필수’라는 그러한 의미의 정보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산더미 같은 정보의 바다에서도 그 하나를 위해 정보의 전체를 뒤져야 하는 그러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애석하게도 간과되어지는 모습 속에서의 고통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은 현대인들의 동의적인 차원을 말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정보라는 것과 객관적 사실이라는 개념이 달리 나타날 수 있지만 그 기본적인 중요성에서 같이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사실들이라고 하는 것 그 증거들이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귀에 담아두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 것에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적 실제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9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변화산에서 주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심과 그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외아들의 귀신들림에 대한 고쳐주심을 구함과 주께서 고쳐주심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귀담아 둘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울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제자들의 누가 높은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에 대한 것과 주께서 아이를 세워 가르쳐주심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9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음에 대하여서 주께는 반대하는 자가 아니면 위하는 자임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승천 기약이 차감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냄과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음과 그에 따른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릴 것에 대한 제안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어디로 가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과 그러한 여정이라고 함에 있어서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부친의 장사에 대한 질문과 가족을 돌아볼 기회를 구하는 자들에게 쟁기를 잡은 자로서 뒤로 돌아봄에 대한 책망에 대한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께서 귀담아 두라고 하심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에 인식되어지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러한 것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하심으로써 그 증거됨에 대한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외아들의 귀신들림에 대한 아비의 고통에 대하여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과 예수께서 고침에 대한 것은 예수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의 타락한 천사들로써의 귀신들의 주장함에 따른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예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의 뜻하심 안에서 예수님의 고난받으심에 대한 것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제자들이 고친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계시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고치신다고 하는 것과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목자로서의 예견되어진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심이 그 아이를 고치심과 주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하는 것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동역적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것임을 주목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별세하심에 대한 것을 이미 말씀하심을 마음에 두라고 하시는 것과 그것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같은 주의 역사하심에서 분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신 주님의 뜻하심과 그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이 알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높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주 앞에서 정체성을 받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높아져야만 어떤 일을 한다는 상대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의지하고 있음에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할 것을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순종에 대한 의미로서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의 모습은 배척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또한 그러한 것마져도 주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따른 우리를 의롭다 하신 가운데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하는 그러한 믿음의 권세가 있고 분별하여 실제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의 권세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관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은혜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일일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찾겠다는 그러한 개념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뜻하심을 빙자하는 그러한 형식적인 것만 갖춘 자들의 모습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에 대한 책망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음에 대한 책망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귀담아 두어야 할 주의 말씀하심은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의 동일하게 나타나게 되어지는 주의 부활이 분리되어 나누어진 다른 하나님의 뜻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씀과 같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과 그러한 의롭다 하신 이의 형상을 덧입고 회복되었기에 믿음으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하여 그 정당한 뜻하심을 따를 때에 땅에서 메이면 하늘에서도 메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교회의 권세와 성도의 권세의 실제를 나타내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주의 말씀하심을 우리의 귀에 담아두며 주의 뜻하심을 잘 감당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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