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24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레10:8-20
모세가 좋게 여겼더라
인생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좀더 지난 세월에 잘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불행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을 잊고 싶은 마음에 술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지울 수 없지만 지울수 있는 것같은 효과와 스트레스적인 것을 잠시 잊고 싶은 노력들인데 사실 그러한 것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음주를 하시는 분들도 인정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후에 일시적인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속이나 머리가 아픈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해보는 그러한 실험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또한 귀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레위기서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론에서 말씀하시는데 아론과 아론의 후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도록 하심과 영영한 규례라는 말씀과 그리하여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그 아론의 남은 아들들에게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으라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랐음에 대하여서 아론에게 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식이라고 함을 그렇게 행함을 책망하였는데 아론은 모세에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라고 답함이 기록되어 있고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과 아론의 생각이 다른 것같이 보이면서도 모세가 좋게 여겼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볼 때에, 레위기 9장은 제사장들을 성별하고 거룩하게 함에 있어서 7일이 지난 8일째 첫 공식적인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음에 대한 것과 그 직분이 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써 행하여지고 또 그 제사장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여드레날에 평안하기를 바라시며 그들에게 나타나서'(마 20:26)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제사장적인 직분의 사실성을 힘입을 수 있도록 말씀하심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또한 사도행전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 10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드리는 가운데서 죽임을 당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된 자로서 아론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라고 말함이 오늘 본문의 내용적 정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느 부모가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슬픔이라고 함은 그러한 감정의 골은 어떤 합리적인 말로도 매울 수 없는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분별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름을 잊기 위해서라도 독주를 찾을 수 있는 정황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한잔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모세는 경계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 중에서 아론과 그 제사장들이 먹어야 할 것을 불살랐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이것은 감정에 따른 분별력을 상실한 마치 술취하여서 분별력을 상실한 것과 같은 행위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의 제사장적 직분을 망각한 것으로 책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레 10:9)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슬픔에 따른 분별없는 이성적 사각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신 믿음으로 사실분별을 하였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할 때에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제사장적 실존과 그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충실했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왕적 권세, 제사장적 권세, 선지자적 권세를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성도의 권세와 증거를 기억할 때에 구약에서의 특별한 부류의 제사장을 말함은 이제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적인 인식과 상통하게 되어지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실제의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들라고 하면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마 10:37)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 죽은 줄 모르고 그 아들을 위해 간구하다가 죽은 후에는 주의 뜻하심의 선하심을 받아들여서 치우치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니다(삼하 12:19~23)
이러한 모습은,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제사장적 권세 즉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정함 거룩함을 구별하여 사실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도록 부름을 받음에 있어서 그 공적인 직분적 분별을 잊지 않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심의 의미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적 사유 즉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판단과 행함을 원하실까'에서 그 공적인 사역적 삶을 아주 평범한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입장에서는 구약에 불편하고 현대적이지 못한 것은 다 임의적으로 제하고 새로운 정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신약을 말하고 있고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계시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함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고후 1:19,20)에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부활하심에서 제사라는 개념의 실제를 완성하셨음에 따라서 지금은 구약에 제사적 입장의 현실적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계시적 실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에 따른 사실을 모세도 마음에 좋게 여긴다는 것과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분별하여 사실화 해 나가는 제사장적 실존을 메시아 안에서 이루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릴때에 지우개로 공책의 글씨를 지우다가 공책을 찢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적 불편함과 어려움과 정말 기억하기 싫은 것들로 점철되어진 우리의 지난날들 다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임의적인 실험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로서 그의 직분적 수행이라고 하는 제사장적 권세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그래서 부인하고 싶고 그것이 옳다고 보여지는 우리의 삶의 지난날들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다는 것과 지금을 위해서, 자존의 절대자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셨음을 믿을 수 있을 때에 나의 한정적인 생각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 또는 일부를 지워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공책을 찢는 것과 비교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로서의 내 삶 내 생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거룩하고 판단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귀히 보시고 인도하신, 비록 내가 의식하지 못한 때라고 하여도, 그 삶이 찢어지는 것은 옳지 않으며 현재와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는 것이 성경적인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속에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는데 사용되어질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슬픔의 감정과 미움과 같은 여러가지 분별력을 잃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과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들을 믿음으로 지울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아론과 같이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레10:8-20
모세가 좋게 여겼더라
인생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좀더 지난 세월에 잘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소위 불행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을 잊고 싶은 마음에 술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지울 수 없지만 지울수 있는 것같은 효과와 스트레스적인 것을 잠시 잊고 싶은 노력들인데 사실 그러한 것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음주를 하시는 분들도 인정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후에 일시적인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속이나 머리가 아픈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해보는 그러한 실험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면 또한 귀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레위기서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증거가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론에서 말씀하시는데 아론과 아론의 후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도록 하심과 영영한 규례라는 말씀과 그리하여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구별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그 아론의 남은 아들들에게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중 소제의 남은 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으라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살랐음에 대하여서 아론에게 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식이라고 함을 그렇게 행함을 책망하였는데 아론은 모세에게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라고 답함이 기록되어 있고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과 아론의 생각이 다른 것같이 보이면서도 모세가 좋게 여겼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레위기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펴볼 때에, 레위기 9장은 제사장들을 성별하고 거룩하게 함에 있어서 7일이 지난 8일째 첫 공식적인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였음에 대한 것과 그 직분이 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써 행하여지고 또 그 제사장의 응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여드레날에 평안하기를 바라시며 그들에게 나타나서'(마 20:26)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제사장적인 직분의 사실성을 힘입을 수 있도록 말씀하심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또한 사도행전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서 10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론의 두 아들이 다른 불을 드리는 가운데서 죽임을 당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된 자로서 아론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라고 말함이 오늘 본문의 내용적 정황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자식이 죽었는데 어느 부모가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슬픔이라고 함은 그러한 감정의 골은 어떤 합리적인 말로도 매울 수 없는 모습이 있을 수 있고 분별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름을 잊기 위해서라도 독주를 찾을 수 있는 정황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한잔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모세는 경계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 중에서 아론과 그 제사장들이 먹어야 할 것을 불살랐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이것은 감정에 따른 분별력을 상실한 마치 술취하여서 분별력을 상실한 것과 같은 행위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의 제사장적 직분을 망각한 것으로 책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레 10:9)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슬픔에 따른 분별없는 이성적 사각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주신 믿음으로 사실분별을 하였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목할 때에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제사장적 실존과 그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충실했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왕적 권세, 제사장적 권세, 선지자적 권세를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성도의 권세와 증거를 기억할 때에 구약에서의 특별한 부류의 제사장을 말함은 이제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적인 인식과 상통하게 되어지며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실제의 사실을 증거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들라고 하면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옳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마 10:37)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 죽은 줄 모르고 그 아들을 위해 간구하다가 죽은 후에는 주의 뜻하심의 선하심을 받아들여서 치우치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니다(삼하 12:19~23)
이러한 모습은, 분별력이 없는 가운데서 주의 제사장적 권세 즉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정함 거룩함을 구별하여 사실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도록 부름을 받음에 있어서 그 공적인 직분적 분별을 잊지 않도록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이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심의 의미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주의 뜻하심을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적 사유 즉 '예수님이시라면 어떤 판단과 행함을 원하실까'에서 그 공적인 사역적 삶을 아주 평범한 우리의 삶에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비방하는 입장에서는 구약에 불편하고 현대적이지 못한 것은 다 임의적으로 제하고 새로운 정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신약을 말하고 있고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계시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함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고후 1:19,20)에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부활하심에서 제사라는 개념의 실제를 완성하셨음에 따라서 지금은 구약에 제사적 입장의 현실적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계시적 실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에 따른 사실을 모세도 마음에 좋게 여긴다는 것과 그의 마음 속에 계시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분별하여 사실화 해 나가는 제사장적 실존을 메시아 안에서 이루실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릴때에 지우개로 공책의 글씨를 지우다가 공책을 찢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들의 현실적 불편함과 어려움과 정말 기억하기 싫은 것들로 점철되어진 우리의 지난날들 다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서 임의적인 실험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로서 그의 직분적 수행이라고 하는 제사장적 권세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그래서 부인하고 싶고 그것이 옳다고 보여지는 우리의 삶의 지난날들 지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선을 베푸셨다는 것과 지금을 위해서, 자존의 절대자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셨음을 믿을 수 있을 때에 나의 한정적인 생각안에서 우리의 삶 전체 또는 일부를 지워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공책을 찢는 것과 비교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로서의 내 삶 내 생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거룩하고 판단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귀히 보시고 인도하신, 비록 내가 의식하지 못한 때라고 하여도, 그 삶이 찢어지는 것은 옳지 않으며 현재와 앞으로의 삶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는 것이 성경적인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속에 지우개가 있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임의적으로 부정하는데 사용되어질 것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슬픔의 감정과 미움과 같은 여러가지 분별력을 잃게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과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들을 믿음으로 지울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아론과 같이 '옳다 여기심'(고전 11:19)을 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