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22, 2006

최후의 만찬 이해 (The last supper)

2006년 5월 2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14-30
최후의 만찬 이해

요즘은 세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유행하는 인기몰이 사상과 매체의 형성을 주목하게 됩니다. 언제나 그러한 흥미와 인기몰이라는 개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행함에 대한 실제적인 윤리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취하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새 언약을 세우신 유월절 식사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린 그림에 대한 이해로 예수님의 사상을 이해한 그 그림을 그린자의 인식을 확대 그리고 재구성하여 연구한 내용의 글과 그것을 영상화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합리성으로써 비로소 절대의 재가가 부여되어있는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을 판단한다는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이거늘 합리성에서 비로소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기만되어진 자들의 임의적 자기 이성들의 표현이 되어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오늘 본문에서의 그 증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 문둥이 집에 있을 때에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일과 그것에 대한 주님의 말씀하심이 있은,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이 예수님을 넘겨주리니 얼마를 주겠느냐는 흥정과 함께 은 삼십을 달아 받아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유월절 잡수실 것을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는지를 질문함에 예수께서 성 아무에게 가서 선생님 말씀이 네 집에서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제자들이 예비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식사를 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함께한 자들 중에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근심하며 자신들인지 주께 묻게 되는데, 주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주님을 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유다가 말함에 유다 자신이 말하였다고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그것이 주의 몸임을 말씀하시고 또 잔도 축복하셔서 이것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위하여 흘리는 주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말씀과 함께 이르시는 말씀으로써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심과 이에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을 팔게 되어지는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그러한 상대적인 인식의 행보에 실제적으로 상관없이 주의 뜻하심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유다의 부정된 이성적 판단이 생겨났을까 하는 것과 주의 새 언약을 세우심에서 말씀하신 그 뜻하심을 찬미함에 있어서의 그 중심은 어떠함이 옳은 것으로 받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본문의 문맥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한 본문에 대한 이해에 선행되어질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획일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때로는 한 문장 한 단어적 의미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 함을 읽을 때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문맥적인 차원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본문에서 언급되어질 것입니다.)

먼저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실제적인 경제적 물질적 이득을 취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고 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문맥적으로 앞서 있는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은 여인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가운데서 기념(memorial)되는, 기억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앙인으로서의 누구나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라는 그 보편성을 재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 앞서 그 항유를 부은 여인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의 하나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때에 합리성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실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증거는 주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주의 죽으심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그에 따른 사실이해를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을 주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으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은 유다의 입장에서는 이제 예수님이 죽을바에야 그를 넘겨주고 자신의 상대적 입지와 또한 실리적 입장을 챙긴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신다는 것에서 진정 사실을 말하는 것을 유다는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 사실인가 상황적 요구에 따른 필요성에 따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타당성으로 하나님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를 판단하는 있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는 결국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위험한 놀이로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계속되어질 수도 있는 잘못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것이 소위 다빈치 코드와 같은 예수님을 팔아 돈을 챙기는 자들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이후 주의 뜻하심을 본 유다는 그 돈을 성전고에 돌리지만 그것으로 밭을 사서 '피밭'(마 27:8; 행 1:19)이라는 뜻에 여행객들의 무덤을 삼았던 것입니다.(마 27:6~8)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예수님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유다행각'들로써 그러한 사상들을 경험하는 여행객들의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실제적으로 주의 뜻하심을 부정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함을 나타내는 도구적인 것으로 실제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물론 그 도구적인 것이 없이 하나님이 그 뜻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볼 때에 그 증거적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앞에서 영혼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마땅히 증거해야 할 예수님의 뜻하심을 우리 성도들이 증거해야 증거할 뿐입니다. 주의 양들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주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을 주목합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비방이나 부인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판단받지 않은 분으로써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고 자기를 기만하는 가운데서의 윤리적 행태는 그 존재적 시비를 판단 받으며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있었기를 바라는 중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식과 한계와 그 자유와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만찬에 대한 새언약을 세우시는 본문'(마 26:26~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최후의 만찬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와 살로써의 그 예식을 행함에 있어서 주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인 그 뜻하심의 언약적 존재로서의 인증이 되어지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에 새살이 생겨나고 피가 흘려 따뜻한 생명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비유적인 표현을 말씀하시면서도, 실제적인 것으로써, 함께하시는 재가가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의 함께하심의 실존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절대의 재가 있는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더욱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주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또 임하실 것이라는 이미와 아직이 한 사건에 집약되어진 표현입니다. 즉 예수께서 세우시는 이 언약적 실제의 예식은 이미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가운데서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 같이 표현되어진 것으로써 이제는 다른 언약식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흉내내어서 자신이 자존자인 것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계 13:11~15) 그러한 자존자 행세를 하는, 예수님의 흉내를 내는 자들이, 그와 같이 예수님 흉내를 내며 새로운 언약식을 베풀 그 자들이, 바로 불법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는 이 예식과 식사는 마지막 식사(The last supper)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후 제자들을 만나셔서 음식을 드신 것이나 또는 갈릴리 해변에서 조반을 드신 것과 같은 것은 이 언약을 세우시는 것으로써의 식사 최후의 만찬과는 비교되어져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 성도들은 앞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의 장사를 위하였던 그 여인의 증거와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한 자기 계시의 뜻하심을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지는 우리의 실존과 삶과 삶의 해석이 사실임을 믿는 것(고후 1:19,20)이 우리 성도들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곳에서 기억되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해와 증거의 합당함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가룟유다와 같이 상황논리에 따라서 예수님을 파는 잘못을 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조장하는 경우의 한시적인 악함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에는 실제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의 선하심을 그리고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찬미하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은혜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참고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의식에 의한 사실규정의 정당함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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