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1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6:57-75
권능의 우편에 앉은 인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말하게 되어지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립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이야기라고 할 때에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고려하는 객관적인 판단에서는 그 말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여서, 어떠한 질문이나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이나 표현 그리고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에 앞서 그것이 올바른가 성립되는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성립되어지도 않는 문제에 대하여서 답을 요구하거나 그것에 답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의 당위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나 질문한다는 것에만 의미두고 있고 아무 생각도 못하는 판단중지적 개념의 말에 미주알 고주알 답변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지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이, 항상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요즘 많이 대두되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자가 웃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오늘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할 수 있도록 들리는 목자의 음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주께서 그 기록된 말씀대로 잡히시고 이제 유다와 함께한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끌고 가게 되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으나 그 증거를 찾지 못하다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는 그 증거가 있자 대제사장은 그 치는 증거가 어떠한가 예수께 말하였으나 주께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함에 주께서 '네가 말하였다'라고 대답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그것을 보고 대제사장은 그것과 같이 참담한 대답이 없다면서 제사장 옷을 찢고 말하기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함에 따라서 그 하속들이 주님께 주먹질과 손짓을 하고 폭력과 조소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에서는,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바깥뜰 앉았는데 각기 두 비자와 다른 곁에 섰던 사람이 '너도 갈릴리 사람과 함께 있었도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는 말에 모두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나니 닭이 울더라는 기록과 함께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참담하다고 말하게 한 주님의 말씀과 그것을 뒤늦게 알게된 베드로의 회개의 상관관계가 그것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과 그로인한 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그들이 주의 말씀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부분은 그들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써 우격다짐적 부정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게 되는 부분이라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유다와 그 함께한 자들이 잡아와서 예수님에 대한 즉석재판과 같은 임의적 형식이나마 갖추려고 할 때에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고 자기들의 상식적으로도 증거가 될만한 것이 없었던 것을 고심하던 가운데 형식적인 측면의 상대적 여지가 있는 증거를 하나 내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헌다는 불경과 상식적으로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는 식의 신앙의 형식을 갖춘 실제적으로는 임의적인 그래서 거짓증거가 되는 증거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되신 예수님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전된 주님의 몸을 말씀하신 것인데(요 2:19~22 참고)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사태파악을 임의적으로 해서 조작한 그런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 질문과 판단의 증거를 요구하는 말의 성립되어짐에 대하여서 답변하실 의미를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잠잠하셨고, 대제사장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신의 임의적 기득권적 재판권을 가진 것이 마냥 실제적인 것과 같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렇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이러한 말에 대한 것을 제대로 비판과 그에 따른 잘못을 가르치는 것이 대제사장의 입장이 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임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는 것으로 대제사장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슬픔이나 어떤 감정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는 아론이 하나님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자신들의 아들들로 인해서 옷을 찢지 않았고 오히려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사실로 행함에 따라 모세의 좋게 여김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레10:8-20참고)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명분에 충실한 것과 같이 그 일반대중을 기만하고 상대적 정당함을 강탈하는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정당함을 말함에 따라서 그러한 제사장적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이 겁없이 그리스도께 폭력의 죄를 더욱 가중적으로 범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한층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런 잘못된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 참담함을 위해 임의적으로 상대적 정당함으로 부인하려고 했던 것이 그 총체적인 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것에 대한 분명한 뜻하심을 주목하는 것이 또한 성도의 기본적인 중심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안티적 개념에서 한 사실을 주목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인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임을 본문을 통해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것에 대하여서..
권능의 우편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을 말씀하시는데 상대적으로 우편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언어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언어를 절대의 언어로서의 상대적인 언어로 구별하여 사용하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절대의 권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측면을 살피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 즉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것의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인자로서의 상대적인 존재의 모습과 그의 상대적인 형태로서의 그 말씀이 자존자로서의 자기 절대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개념만으로 비로소 유사비교 판단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형태적인 면이 있어도 그것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일뿐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절대의 말씀으로써 상대적인 주의 존재와 주의 말씀을 판단함의 정당함은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떠한 상대적 정당함에 따른 비판, 비록 상대적인 무한의 정당함을 가진 바된, 비판이라고 하여도 모두 기각되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권능은 모두가 핑계할 수 없는 복음 자체로서 나타나는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말씀에 대하여서..
여기서 '하늘 구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신적 개념의 하늘이나 또는 자연적인 측면의 하늘이라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하늘이라고 함에 주의 주권적 뜻하심의 거룩함과 보편성을 전제로 한 구별되어진 언어로서의 상식적 언어인 '하늘'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과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을 때와 같은 현상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7:1~13 참고)
베드로는 그곳이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되 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 빛난 구름이 나타나서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막 9:8 왕상 8:11 참고) 두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과 함께 예수만 보이게 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17: 4~9, 막 9:1~13 참고)
즉 본다고 하는 것의 인식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비로소 좋게 보인다는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적 판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들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의식하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인식들, 본다고 하는 것으로써 판단되어지는 것들은 주님을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별되어진 인식으로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식의 방향을 한정시키면서 또한 상대적 무한의 인식을 보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정당함이 부인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되느니라'(고후 1:19,20)는 그 말씀의 의미를 통한 신앙의 합리성과 노력의 사실들이 구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이 아주 상대적인 극단적 당위성으로 사람들의 눈먼 정당함을 강탈해서 기정사실화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앞서 말한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의식한 것입니다. 즉 믿지 못하지만 의식할수밖에 없는 자이기에 그러한 불법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그 상대적인 정황적 불리함과 그에 따른 자신의 존재적 변명을 하게 될 때에도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이미 부정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닭 울음을 통해서 주의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닭 울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시점에서 주의 말씀하심이 깨닫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특히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마음에 둘 수 있었던 베드로는 그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의 권능 앞에서 세상이 부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임마누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때에 자기의 임의적 신앙의 확신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것이 후대의 속설로 내려오기도 하는 베드로의 순교의 이야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교적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사도 베드로의 그 신앙의 확신을 찾음에 있어서 임의적인 것을 회개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정당함에 따른 그 가르침에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정당함을 찾아서 그러한 죽기까지 순종을 한 것으로 선히 받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저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중심의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인위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고 또 오히려 살기 위해 주님을 저주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여서 고민하며 회개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사역을 위해 그 뜻하심의 정당함이 부여되기를 기도하신 주님의 감람산 기도에 모든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이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일시적이나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풍조와 그 기만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상식적인 보편성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합당하게 삼위일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주기도적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고백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그 실존이 합리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확실하게 주의 말씀이, 베드로에게와 같이, 우리 중심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요 10:1~27 참고)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받아서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심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으로서, 임마누엘하시고 있으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있으신 것을 마음에 두시는 분들로서 세상의 풍조에 휩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로서 주의 마음에 꼭들게 되는 참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담아내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26:57-75
권능의 우편에 앉은 인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말하게 되어지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립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이야기라고 할 때에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고려하는 객관적인 판단에서는 그 말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여서, 어떠한 질문이나 판단을 요구하는 문장이나 표현 그리고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에 앞서 그것이 올바른가 성립되는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성립되어지도 않는 문제에 대하여서 답을 요구하거나 그것에 답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용납되어질 수 있는 것의 당위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나 질문한다는 것에만 의미두고 있고 아무 생각도 못하는 판단중지적 개념의 말에 미주알 고주알 답변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지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이, 항상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요즘 많이 대두되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자가 웃으심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이 오늘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할 수 있도록 들리는 목자의 음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57절에서 6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주께서 그 기록된 말씀대로 잡히시고 이제 유다와 함께한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끌고 가게 되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으나 그 증거를 찾지 못하다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는 그 증거가 있자 대제사장은 그 치는 증거가 어떠한가 예수께 말하였으나 주께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함에 주께서 '네가 말하였다'라고 대답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그것을 보고 대제사장은 그것과 같이 참담한 대답이 없다면서 제사장 옷을 찢고 말하기를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함에 따라서 그 하속들이 주님께 주먹질과 손짓을 하고 폭력과 조소를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9절에서 75절까지의 말씀에서는,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바깥뜰 앉았는데 각기 두 비자와 다른 곁에 섰던 사람이 '너도 갈릴리 사람과 함께 있었도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는 말에 모두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나니 닭이 울더라는 기록과 함께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참담하다고 말하게 한 주님의 말씀과 그것을 뒤늦게 알게된 베드로의 회개의 상관관계가 그것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대제사장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식보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과 그로인한 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그들이 주의 말씀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부분은 그들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써 우격다짐적 부정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보게 되는 부분이라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유다와 그 함께한 자들이 잡아와서 예수님에 대한 즉석재판과 같은 임의적 형식이나마 갖추려고 할 때에 거짓 증인들이 많이 왔고 자기들의 상식적으로도 증거가 될만한 것이 없었던 것을 고심하던 가운데 형식적인 측면의 상대적 여지가 있는 증거를 하나 내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헌다는 불경과 상식적으로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는 식의 신앙의 형식을 갖춘 실제적으로는 임의적인 그래서 거짓증거가 되는 증거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되신 예수님의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전된 주님의 몸을 말씀하신 것인데(요 2:19~22 참고)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사태파악을 임의적으로 해서 조작한 그런한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 질문과 판단의 증거를 요구하는 말의 성립되어짐에 대하여서 답변하실 의미를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잠잠하셨고, 대제사장은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신의 임의적 기득권적 재판권을 가진 것이 마냥 실제적인 것과 같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그렇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신 말씀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이러한 말에 대한 것을 제대로 비판과 그에 따른 잘못을 가르치는 것이 대제사장의 입장이 될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임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비로소 의지하는 것으로 대제사장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슬픔이나 어떤 감정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서는 아론이 하나님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자신들의 아들들로 인해서 옷을 찢지 않았고 오히려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믿음으로 구별하여 사실로 행함에 따라 모세의 좋게 여김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레10:8-20참고)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명분에 충실한 것과 같이 그 일반대중을 기만하고 상대적 정당함을 강탈하는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보편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정당함을 말함에 따라서 그러한 제사장적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이 겁없이 그리스도께 폭력의 죄를 더욱 가중적으로 범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한층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런 잘못된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 참담함을 위해 임의적으로 상대적 정당함으로 부인하려고 했던 것이 그 총체적인 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할 때에 그것에 대한 분명한 뜻하심을 주목하는 것이 또한 성도의 기본적인 중심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안티적 개념에서 한 사실을 주목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인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임을 본문을 통해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것에 대하여서..
권능의 우편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을 말씀하시는데 상대적으로 우편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언어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언어를 절대의 언어로서의 상대적인 언어로 구별하여 사용하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절대의 권능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측면을 살피면,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 즉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것의 정당함이 절대적인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인자로서의 상대적인 존재의 모습과 그의 상대적인 형태로서의 그 말씀이 자존자로서의 자기 절대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개념만으로 비로소 유사비교 판단 평가절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형태적인 면이 있어도 그것의 정당함은 상대적인 것일뿐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절대의 말씀으로써 상대적인 주의 존재와 주의 말씀을 판단함의 정당함은 기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떠한 상대적 정당함에 따른 비판, 비록 상대적인 무한의 정당함을 가진 바된, 비판이라고 하여도 모두 기각되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권능은 모두가 핑계할 수 없는 복음 자체로서 나타나는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말씀에 대하여서..
여기서 '하늘 구름'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범신적 개념의 하늘이나 또는 자연적인 측면의 하늘이라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자존의 절대자로서 그 하늘이라고 함에 주의 주권적 뜻하심의 거룩함과 보편성을 전제로 한 구별되어진 언어로서의 상식적 언어인 '하늘'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과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을 때와 같은 현상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17:1~13 참고)
베드로는 그곳이 너무 좋아서 초막 셋을 짓되 주를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 빛난 구름이 나타나서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막 9:8 왕상 8:11 참고) 두려움이 있고 그 가운데서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과 함께 예수만 보이게 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마 17: 4~9, 막 9:1~13 참고)
즉 본다고 하는 것의 인식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에서의 비로소 좋게 보인다는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적 판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들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의식하고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인식들, 본다고 하는 것으로써 판단되어지는 것들은 주님을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별되어진 인식으로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식의 방향을 한정시키면서 또한 상대적 무한의 인식을 보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정당함이 부인되어지며, '예수님 안에서 항상 예만 되느니라'(고후 1:19,20)는 그 말씀의 의미를 통한 신앙의 합리성과 노력의 사실들이 구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제사장이 아주 상대적인 극단적 당위성으로 사람들의 눈먼 정당함을 강탈해서 기정사실화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앞서 말한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의식한 것입니다. 즉 믿지 못하지만 의식할수밖에 없는 자이기에 그러한 불법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그 상대적인 정황적 불리함과 그에 따른 자신의 존재적 변명을 하게 될 때에도 주의 말씀하심의 정당함이 이미 부정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닭 울음을 통해서 주의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닭 울음이라고 하는 것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시점에서 주의 말씀하심이 깨닫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특히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마음에 둘 수 있었던 베드로는 그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의 권능 앞에서 세상이 부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임마누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때에 자기의 임의적 신앙의 확신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것이 후대의 속설로 내려오기도 하는 베드로의 순교의 이야기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교적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사도 베드로의 그 신앙의 확신을 찾음에 있어서 임의적인 것을 회개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정당함에 따른 그 가르침에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정당함을 찾아서 그러한 죽기까지 순종을 한 것으로 선히 받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저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중심의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인위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고 또 오히려 살기 위해 주님을 저주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여서 고민하며 회개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신의 사역을 위해 그 뜻하심의 정당함이 부여되기를 기도하신 주님의 감람산 기도에 모든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이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일시적이나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할 때에 세상의 풍조와 그 기만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상식적인 보편성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정당함을 말씀하시고 있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합당하게 삼위일체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주기도적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고백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그 실존이 합리적인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둘 때에 주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확실하게 주의 말씀이, 베드로에게와 같이, 우리 중심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요 10:1~27 참고)
이러한 중심을 바르게 받아서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심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으로서, 임마누엘하시고 있으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있으신 것을 마음에 두시는 분들로서 세상의 풍조에 휩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로서 주의 마음에 꼭들게 되는 참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담아내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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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