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27:1-10
유다의 뉘우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한 예를 유다의 뉘우침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 선한 면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그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보편적인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 어떤 무대 공연에서도 주인공이 있으면 그 상대편의 악역도 있어야 그 드라마 같은 공연의 실제적인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말함에 있어서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증거의 중심적 실제일 때에 그 악한 조연역활이라고 할 수도 있는 가룟유다의 현실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마치 하나의 보편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판단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판단이 되는 우리 인생,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적도 알 수 없어 보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듯한 현실적인 판단에서 판단되어지는 나그네의 모습인데, 같은 인간의 고뇌로써, 어떤 일에 대한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고 용납되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유다의 판단은 재평가 되어야하며 그의 공로는 기독교에서 선히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개념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가룟 유다가 그와 함께한 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불법의 재판형식을 갖춘 후에 주 예수님을 모독하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니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면서 유다 그가 죄를 당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해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되는데 대제사장들은 그 은삽십이 성전고에 넣기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돈으로 토기장의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고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기록된 말씀대로 되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회개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섬김이라는 것으로서 선히 받을 수 없음에 대한 것도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이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장인 마태복음 26장 마지막에 기록되어져 있는 베드로의 회개 그 뉘우침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마 26:74~75) 즉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난 뒤에 닭이 두 번 울게되어지는 때에 그의 주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나가 심히 통곡하였음과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문맥적 상황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회개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아니라고 할 때에 유다의 뉘우침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는 어떤 중심의 회개를 했으며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주목할수 있고 말씀하심의 강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그 말은 거의 모두 '메타노에오'라는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 3:2; 4:17; 계2:16,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영역으로 동일하게 'repent''후회하다, 회개하다, 유감으로 여기다; 참회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로 표현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이미 성경에서 구별하여 달리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해석적 당위성은 이미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욱 회개하라는 말에 일관성있게 쓰여진 '메타노에오'라는 말을 놓아두고 다른 말인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기자가 선택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영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차이는 실제적인 차이로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는 그 말과 다른 의미에서의 뉘우침이라는 것을 성경기자는 특별영감속에서 기록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주님을 팔때에 하신 말씀 '네가 인자를 파느냐'(마 26:49~50; 눅 22:48)라는 말을 하셨을 때에 그 '판다'는 그 말은 '파라디도우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앞에 어떤 것을 내놓아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는 마치 계약되어서 자신의 소유와 상관없는 것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하는 소유권이전을 말씀하셨던 '테텔레스타이' 즉 '거래가 끝나서 이제 거래물은 내 것이 되었다'라는 말과 정 반대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주님의 통치하심과 함께하심과 그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예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비로소 찾는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구속의 실제와 거룩하신 자로서 믿는자에게 그 판단의 구별적 사실을 재가하시는 주님의 부여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이미 그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의 입장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를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의 보편성으로써 비록, 그 보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공감되어질 수 있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되어지고 상대적 편협이라는 것으로써의 보편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의 보편과 비교되어질 수도 없는 그러한 판단으로 하나의 보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기만성이 있을 뿐인 기각되어진 상대적 보편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인식과 판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마 27:3) 여기서 스스로 뉘우침이라고 할 때에 이 '스스로'의 개념은 재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써 결국 '임의적'이라는 판단의 사실규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라는 말인 '메타노에오'라는 말의 뜻은 후회하다(repent)는 마음을 변화시키다(to change one's mind)라는 말로서 먼저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볼 때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하심이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가운데서의 스스로가 되지 않고 임의적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또한 증거는 본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그 존재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신의 주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였음에 대한 총체적인 그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의 하나님의 이름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중심을 취하지 않고 그 괴로움으로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상대적 정당함을 요청할 수 있으나 절대의 재가있는 정당함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아주 인간미라는 보편적 인식에서 정당함을 부여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그의 주님을 판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이 자신으로부터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중심이 전혀 없는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회개라는 개념은 이처럼 자신의 임의적인 도덕적 판단과 생각에서 정도면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뉘우침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만으로써 진정한 그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의 말씀이 기억나고 그 말씀을 주목할 때에 그 말씀하심에서 그 말씀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자신의 존재의 판단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로소 그 뉘우침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 회개하는 그 모습이 '회개하라'(메타노에오)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규범적 한계를 밝히 말하지 못한다고 그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마치 상대적인 보편적 이야기가 절대적인 보편인 것과 같이 착각에 빠지게 되는 소위 '나르시즘'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자기 파괴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 사람들 불법의 사람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와 같이 그가 취한 그의 정적인 행동과 임의적 판단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인 설득력이 절대의 보편과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는 보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표현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러한 기만적 요소는 다른 형태로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셨던 그 계시가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가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적 규정과 존재를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상대적 보편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선한 역이 있으면 악역도 있어야 된다 또는 악역이 없으면 선한 역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의 뜻하심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악을 선하다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개념의 보편성의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유다의 그 행각이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자신의 그 뜻하심을 선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말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재가있는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정하심에 다른 여지를 말하는 것도 이미 사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우리가 하지 않음이 좋은 것이니 말하지 못하여도 하지 않아도 그 정당함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상대적인 역활로 인한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이라는 그 구속의 의식을, 비록 죄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다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그러한 상대적 인식의 보편성의 유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행적에 대한 선함을 상대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성립과 존재적 사실적 입장은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정적인 기만적 보편성의 당위성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의 뉘우침, 그 회개하는 중심을 가지신 성도들로서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사도는 아니지만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이시대에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줄 주의 마음에 꼭드는 주의 성도 주의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27:1-10
유다의 뉘우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한 예를 유다의 뉘우침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 선한 면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그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보편적인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 어떤 무대 공연에서도 주인공이 있으면 그 상대편의 악역도 있어야 그 드라마 같은 공연의 실제적인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말함에 있어서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증거의 중심적 실제일 때에 그 악한 조연역활이라고 할 수도 있는 가룟유다의 현실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면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마치 하나의 보편성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판단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판단이 되는 우리 인생,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적도 알 수 없어 보이고 목적 없이 살아가는 듯한 현실적인 판단에서 판단되어지는 나그네의 모습인데, 같은 인간의 고뇌로써, 어떤 일에 대한 잘못을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고 용납되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유다의 판단은 재평가 되어야하며 그의 공로는 기독교에서 선히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개념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들의 입장이 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의 정당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감람산 동산에서 가룟 유다가 그와 함께한 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아서 대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불법의 재판형식을 갖춘 후에 주 예수님을 모독하고,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니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면서 유다 그가 죄를 당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해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되는데 대제사장들은 그 은삽십이 성전고에 넣기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돈으로 토기장의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고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기록된 말씀대로 되었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회개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섬김이라는 것으로서 선히 받을 수 없음에 대한 것도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의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이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장인 마태복음 26장 마지막에 기록되어져 있는 베드로의 회개 그 뉘우침과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마 26:74~75) 즉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고 난 뒤에 닭이 두 번 울게되어지는 때에 그의 주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나가 심히 통곡하였음과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본문의 문맥적 상황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회개와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냐 아니냐 아니라고 할 때에 유다의 뉘우침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는 어떤 중심의 회개를 했으며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주목할수 있고 말씀하심의 강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그 말은 거의 모두 '메타노에오'라는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 3:2; 4:17; 계2:16,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영역으로 동일하게 'repent''후회하다, 회개하다, 유감으로 여기다; 참회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로 표현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은 이미 성경에서 구별하여 달리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해석적 당위성은 이미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더욱 회개하라는 말에 일관성있게 쓰여진 '메타노에오'라는 말을 놓아두고 다른 말인 '메타멜로마이'라는 말을 기자가 선택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영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 상대적인 차이는 실제적인 차이로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는 그 말과 다른 의미에서의 뉘우침이라는 것을 성경기자는 특별영감속에서 기록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주님을 팔때에 하신 말씀 '네가 인자를 파느냐'(마 26:49~50; 눅 22:48)라는 말을 하셨을 때에 그 '판다'는 그 말은 '파라디도우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앞에 어떤 것을 내놓아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는 마치 계약되어서 자신의 소유와 상관없는 것을 의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하는 소유권이전을 말씀하셨던 '테텔레스타이' 즉 '거래가 끝나서 이제 거래물은 내 것이 되었다'라는 말과 정 반대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주님의 통치하심과 함께하심과 그 자신의 존재적 정당함을 예수님께로부터 주님께로부터 비로소 찾는다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구속의 실제와 거룩하신 자로서 믿는자에게 그 판단의 구별적 사실을 재가하시는 주님의 부여하시는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이미 그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그의 입장의 보편성은 절대의 재가를 받을 수 없는 가운데서의 보편성으로써 비록, 그 보편의 형식은 상대적으로 공감되어질 수 있다고 하여도 실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되어지고 상대적 편협이라는 것으로써의 보편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의 보편과 비교되어질 수도 없는 그러한 판단으로 하나의 보편성이 있는 것과 같은 기만성이 있을 뿐인 기각되어진 상대적 보편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의 인식과 판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마 27:3) 여기서 스스로 뉘우침이라고 할 때에 이 '스스로'의 개념은 재가를 받지 못한 것으로써 결국 '임의적'이라는 판단의 사실규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하라'라는 말인 '메타노에오'라는 말의 뜻은 후회하다(repent)는 마음을 변화시키다(to change one's mind)라는 말로서 먼저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볼 때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으로써 진정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하심이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바라는 가운데서의 스스로가 되지 않고 임의적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또한 증거는 본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그 존재의 정당함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신의 주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였음에 대한 총체적인 그의 중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의 하나님의 이름의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중심을 취하지 않고 그 괴로움으로 그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상대적 정당함을 요청할 수 있으나 절대의 재가있는 정당함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아주 인간미라는 보편적 인식에서 정당함을 부여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그의 주님을 판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주의 뜻하심이 자신으로부터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중심이 전혀 없는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함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회개라는 개념은 이처럼 자신의 임의적인 도덕적 판단과 생각에서 정도면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뉘우침의 형식을 갖춘다는 것만으로써 진정한 그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주의 말씀이 기억나고 그 말씀을 주목할 때에 그 말씀하심에서 그 말씀의 사실을 의지하여서 자신의 존재의 판단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로소 그 뉘우침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 회개하는 그 모습이 '회개하라'(메타노에오)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규범적 한계를 밝히 말하지 못한다고 그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마치 상대적인 보편적 이야기가 절대적인 보편인 것과 같이 착각에 빠지게 되는 소위 '나르시즘'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자기 파괴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 사람들 불법의 사람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와 같이 그가 취한 그의 정적인 행동과 임의적 판단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인 설득력이 절대의 보편과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는 보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또는 제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표현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러한 기만적 요소는 다른 형태로 항상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셨던 그 계시가 예수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할 때에 그가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말씀하심에서 그 사실적 규정과 존재를 절대 합당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인 상대적 보편에서만 비로소 본다면 선한 역이 있으면 악역도 있어야 된다 또는 악역이 없으면 선한 역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의 뜻하심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악을 선하다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개념의 보편성의 당위성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존의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유다의 그 행각이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자신의 그 뜻하심을 선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말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재가있는 것으로 그 합당함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정하심에 다른 여지를 말하는 것도 이미 사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우리가 하지 않음이 좋은 것이니 말하지 못하여도 하지 않아도 그 정당함이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상대적인 역활로 인한 그 뜻하심을 이루실 것이라는 그 구속의 의식을, 비록 죄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다는 가운데서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적 보편적 입장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그러한 상대적 인식의 보편성의 유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행적에 대한 선함을 상대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성립과 존재적 사실적 입장은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와 같은 정적인 기만적 보편성의 당위성에 따른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이전에 주의 말씀과 상관없는 중심과 마음이 바뀌어서 그 말씀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해석과 그 사실을 믿으며 그 가운데서의 뉘우침, 그 회개하는 중심을 가지신 성도들로서 베드로와 같이 동일한 사도는 아니지만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이시대에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시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내어줄 주의 마음에 꼭드는 주의 성도 주의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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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