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1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민23:13-26
왕을 부르는 소리
조금은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라스트 신(the last scene) 중에 마차경주에 대한 장면이 아주 인상깊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교적 개념의 월계수를 구별하여서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가 그 연구중에 결국 회심하여서 이 작품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약성경을 배경하여서 쓰게된 문학작품이면서도,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오히려 영감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이 저주하기 위해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구약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주목할 때에 축복하게 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번째로 발락이 발람더러 다른 곳에서 저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림이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는 말을 받고 그것을 묻고 있는 발락과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과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발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힘이 들소같다는 것과 야곱과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크냐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을 또 사자에 비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것을 본 발락은 발람을 보고 축복도 저주도 하지 말라고 하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에서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근거는 그들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왕을 부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적 입장에서 주목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에 그 행보를 세차례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오히려 발락과 함께한 자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첫번째 축복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두번째 저주를 위해 소빔들 비스가에 이르렀지만 앞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의 중심'(민 23:10)에 이어서 하나님의 식언치 않으시는 신실하심과 함께 그들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음에 대한 근거로 더욱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라고 하는 기준이 진정으로 타당한가에 대하여서는 세상에서는 동의적 차원에서 말할뿐 '본래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정황적이나마, 본래성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정당함이 타당함에서도 인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저작권이나 로열티와 같은 것 또는 인증에 대한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상식으로 우리 주위에서 읽게 되는 개념들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 즉 그 이름의 뜻은 '유린하는 자' 즉 '파괴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하는 가운데서 그 행보를 마음에 둘 때에 발람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발람의 뜻은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모사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믿는 구약의 성도들의 존재적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하는 합리적인 당위성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속된 표현으로 '절대로 아니다, 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등등의 절대성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사실을 미련하게 그와 같은 방법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발람의 저주라는 것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확실성을 위한 노력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락이 발람을 통해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인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적 정당함을 부인했다고 하는 인식의 확실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도 바로 이러한 몸부림의 어설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이 이른 곳인 '소빔'이라고 하는 곳은 '파수꾼' '살펴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현상적 이해에서의 가장 높은 곳으로써의 위치를 선점하는 기득권을 유도하는 곳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장소에서 '비스가'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절벽, 쪼개진 틈(clef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융기나 지각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높은 낭떨어지나 구렁과 같이 벌어진 경계를 말하는 곳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그 백성들의 존재와 행보를 주목해서 해석한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한 내용중에서는 그들에게는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를 부르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 사상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마 6:9~13),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다는 것'(살전 2:4)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그것을 근거로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람은 멀리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왕을 부르다'라는 히브리 본문은 '터루야 멜렉흐'라고 말하고 있는데, 부르다는 말인 '터루야'라는 말은 '소리치다', 특히 '깨어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이것은 시끄러워보이는 가운데서도 인식의 납득당위성이 비로소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왕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실존이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의 옳게 여김을 받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부르다는 말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경우를 볼 수 있고 또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놀람이라고 하는 것 당황함이라고 함에서의 묘사라고 하면 그 내용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 옥합을 깨뜨림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이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말씀하신 바로서의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는 모든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롭게 말하는 기준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산다는 그러한 상대적 개념과 판단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주권적 정당한 자신의 증거가 자신의 기준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옳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행위라고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자신의 깨트림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는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정황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 파생적 당위성을 가지고 본래성을 주장하는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엉둥한 신의 속성적 개념으로써의 임의적 절대의식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라고 하는 메시야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본래성의 정당함의 실존을 임의적 스스로 취하여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힘이 들소와 같고 그들을 해할 사술과 복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술법들의 합리성은 있다고 하여도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현상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판단 가능성과 또한 속된 표현으로 만만히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소들과 같이 힘은 있지만, 다소 조절이나 어떤 이성적 개념의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가르쳐주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할 때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당위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왕을 부르는 중심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하심 안에서 더욱 신실성의 재가를 받도록 그 말씀을 사모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 서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세상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현상적으로나마 받지 않도록 노력함도 갖추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깨서 왜 고초당했나..라는 찬송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중심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되어지는 왕을 부르는 기도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특히 12월 성탄의 기쁨과 감사로 오늘도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들 속에 함께하며 주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오실때까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나누기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옳게 여기심에 마음을 두며, 왕을 부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받들어내는 담지자들로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민23:13-26
왕을 부르는 소리
조금은 오래된 영화입니다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라스트 신(the last scene) 중에 마차경주에 대한 장면이 아주 인상깊은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교적 개념의 월계수를 구별하여서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하여서 비판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가 그 연구중에 결국 회심하여서 이 작품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신약성경을 배경하여서 쓰게된 문학작품이면서도, 이러한 것에 비교되어질 수 있고 오히려 영감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으로써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이 저주하기 위해서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구약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주목할 때에 축복하게 되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핑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핑계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한 모습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두번째로 발락이 발람더러 다른 곳에서 저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단을 쌓고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림이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과 그의 신하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넣어주는 말을 받고 그것을 묻고 있는 발락과 신하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는 것과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에 발람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힘이 들소같다는 것과 야곱과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크냐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을 또 사자에 비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것을 본 발락은 발람을 보고 축복도 저주도 하지 말라고 하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답변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에서는 복음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근거는 그들의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왕을 부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문맥적 입장에서 주목하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에 그 행보를 세차례하게 되어지고 그 다음에 오히려 발락과 함께한 자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첫번째 축복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두번째 저주를 위해 소빔들 비스가에 이르렀지만 앞서 '그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는 자의 중심'(민 23:10)에 이어서 하나님의 식언치 않으시는 신실하심과 함께 그들이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음에 대한 근거로 더욱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회에서의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관점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의 중요성은 말할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관점이라고 하는 기준이 진정으로 타당한가에 대하여서는 세상에서는 동의적 차원에서 말할뿐 '본래적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 정황적이나마, 본래성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정당함이 타당함에서도 인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어떤 저작권이나 로열티와 같은 것 또는 인증에 대한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식하는 상식으로 우리 주위에서 읽게 되는 개념들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 즉 그 이름의 뜻은 '유린하는 자' 즉 '파괴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하는 가운데서 그 행보를 마음에 둘 때에 발람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발람의 뜻은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을 가진 자로서 모사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믿는 구약의 성도들의 존재적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하는 합리적인 당위성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속된 표현으로 '절대로 아니다, 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등등의 절대성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을 의식하는 가운데서의 정당함을 찾아야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사실을 미련하게 그와 같은 방법에서 확실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발람의 저주라는 것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확실성을 위한 노력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락이 발람을 통해 저주하고자 한 것은 그들의 자의적 인식의 두려움을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적 정당함을 부인했다고 하는 인식의 확실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학자들의 시끄러움(pannic voices)도 바로 이러한 몸부림의 어설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락과 발람이 이른 곳인 '소빔'이라고 하는 곳은 '파수꾼' '살펴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현상적 이해에서의 가장 높은 곳으로써의 위치를 선점하는 기득권을 유도하는 곳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장소에서 '비스가'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절벽, 쪼개진 틈(cleft)'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융기나 지각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높은 낭떨어지나 구렁과 같이 벌어진 경계를 말하는 곳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와 상관이 없는 자들로서, 그 백성들의 존재와 행보를 주목해서 해석한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한 내용중에서는 그들에게는 왕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를 부르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이 있음을 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 사상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마 6:9~13),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다는 것'(살전 2:4)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그것을 근거로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발람은 멀리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왕을 부르다'라는 히브리 본문은 '터루야 멜렉흐'라고 말하고 있는데, 부르다는 말인 '터루야'라는 말은 '소리치다', 특히 '깨어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이것은 시끄러워보이는 가운데서도 인식의 납득당위성이 비로소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왕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서의 그들의 실존이 증거되어지고 있다는 측면에서의 옳게 여김을 받는 그러한 가운데서의 부르다는 말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삼백용사의 경우를 볼 수 있고 또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놀람이라고 하는 것 당황함이라고 함에서의 묘사라고 하면 그 내용적인 것은 후자의 경우 옥합을 깨뜨림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 그 여인이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것인데 그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에 그의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의 거룩함을 부여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의 가치관의 거룩함과 사실을 말한다는 그 증거적 중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말씀하신 바로서의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에게는 모든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새롭게 말하는 기준임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산다는 그러한 상대적 개념과 판단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주권적 정당한 자신의 증거가 자신의 기준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옳음은 예수님을 전파하는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그의 행위라고 하는 것 주님을 위해 자신의 깨트림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로부터 정당함을 입는것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왕을 부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정황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그 파생적 당위성을 가지고 본래성을 주장하는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엉둥한 신의 속성적 개념으로써의 임의적 절대의식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라고 하는 메시야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본래성의 정당함의 실존을 임의적 스스로 취하여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힘이 들소와 같고 그들을 해할 사술과 복술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술법들의 합리성은 있다고 하여도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현상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판단 가능성과 또한 속된 표현으로 만만히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들소들과 같이 힘은 있지만, 다소 조절이나 어떤 이성적 개념의 이해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판단이 있을 수 있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주님가르쳐주신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고 할 때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권세와 당위성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진실로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왕을 부르는 중심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하심 안에서 더욱 신실성의 재가를 받도록 그 말씀을 사모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더욱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고백과 같은 자리에 서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세상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현상적으로나마 받지 않도록 노력함도 갖추게 된다는 사실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왕의 왕 내주깨서 왜 고초당했나..라는 찬송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중심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되어지는 왕을 부르는 기도로서의 삶을 영위해나가면서 특히 12월 성탄의 기쁨과 감사로 오늘도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들 속에 함께하며 주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오실때까지 전하고자 하는 중심을 나누기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옳게 여기심에 마음을 두며, 왕을 부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받들어내는 담지자들로서 세상의 빛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