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19, 2005

사무엘과 미스바

2005년 12월 1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7:1-17
사무엘과 미스바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12월 달입니다. 이맘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내년의 계획을 위한 것도 점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으로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과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이질적(異質的)인 개념은 아니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말할 수 있음을 유념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질적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신앙이 삶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차이로서 다른 개념임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현실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분별함을 말하는 것인데 그 분별의 기준이라고 함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여졌고 그 아들 엘리아살이 궤를 지키게 되었음과 그날부터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들이 여호와를 사모함에 대한 것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의 내용이 되어지는 것으로서의 한 상황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리라는 것을 말하매 이스라엘들이 모여 그곳에서 금식하며 회개하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함에 따라서 사무엘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응답하심이 있어서 큰 우뢰를 발하심으로써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고 이스라엘 앞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패하게 하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였음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도 탈환하게 하시고 평화가 있게 하셨음과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음과 라마 자기 집으로 돌아옴에 그는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이 다스리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자신을 돌아봄과 거룩함의 경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의미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때에 우리의 삶에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적 자리에 세우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의 뜻은 ‘망대 파수하다 감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회집을 생각할 때에는 모두가 알 수 있는 곳이나 또는 잘 알려진 곳이나 또는 회집의 성격상 용이한 곳을 찾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곳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시적인 것이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가운데서 성경으로 특별영감적 구별되어짐을 말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구별되어진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존재할 경우 그것의 합당한 실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망대가 아니라,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그 섭리'(삼상 3:19)를 따라서 그가 명령하였음을 기억할 때에 더욱 그 미스바라는 곳과 관련된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이름에서 그의 존재와 사역적인 증거가 있는 자로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뜻인 것과 같이,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 망대를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들으심과 그로 인한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회집과 회집장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교회를 예표적으로 읽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뜻하심을 따라 행함이 기본인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부분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마 6:9; 눅 12:2)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입술의 언급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우리 인생의 생각과 판단과 행함의 총체적인 방향이라고 함에서도 그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사실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이 바로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의 진리의 말씀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도 그 방법을 취하심에 있어서도 자존의 정당함으로 선택하실 수 있는데 그 취하신 방법으로는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하신다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라고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세워진 질서로서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사실을 분별하여 받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와 윤리적 행함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도덕적 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범함에 있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사상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주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기업의 이방인들로서 형태적인 측면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소송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신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가운데서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들의 기업이 자신들의 것임을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삼상6장참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한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법궤를 돌려주었는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법궤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다는 점과 전에 그러한 상황에서 이겼음에 대한 기억들이 한번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다시 재압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이 인식하고 이스라엘의 기업에 대한 논쟁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법궤라고 하는 것에 한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의 모습을 축소하며 그 상황적 판단을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인식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는 자의 모습으로 마땅히 그들은 범죄하여 죄값을 치루게 되었고 그들은 그 기업소송에서 오히려 불법적인 기업을 돌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이방인들로써 주의 다스리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웅활거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정체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에서 사실화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중세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의 승리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를 판단할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신앙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벧엘을 말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써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 천국을 소유한 자들로서 길갈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한 자들로서 할례를 행함으로써에 비교되어지는 믿음의 세례에 따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선 자의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스바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현실을 판단해 나가는 경건의 사실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상황에서 비로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없는 비극의 사실을 강요받아야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무엘과 미스바, 주의 말씀에서 합당한 종들과 성도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이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사실을 규정하고 그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신의 죄악의 사실을 인하여서 회개하는 참된 사실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의 합당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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