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주일예배설교
눅2:8-20
구주가 나셨도다
이번 주일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와 감사드리는 성탄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 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을 증거함에 더욱 마음깊이 두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초로 하는 주일과 주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축하하는 성탄을 같이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또한 깊게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주가 나셨음을 기뻐하고 증거함에 있어서 유의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기가 나심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있으련만 주의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가 찬 그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영광이 저희를 비취매 그들이 두려워함과 천사의 증거로 두려워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음과 그리스도 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감에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하고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목자들에게 증거되어진 그 내용과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억하며 그 주의 천사의 전한 내용과 그로인한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림의 은혜의 자리가 그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기쁨과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신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세메이온)을 말씀하심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읽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없다는 것의 내용적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그 표적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잘못된 성탄에 대한 이해 즉 표적을 잘못 읽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도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을 잘못 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현대적인 신앙에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인본적으로 돌리는 잘못된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하나님을 자연의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 표현의 취상이 바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주 또는 자연의 자기표현의 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아실현정도의 모습이 가장 귀한 것이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신격화한 인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신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식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인으로 세계의 성인으로 말할 수 있다는 식에서 비로소 머물고 마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잘못된 기반은 하나님을 자연으로 가정한 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주장할 뿐 그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동의적인 차원이 아닌 자체적 차원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다른 진정한 성경에서의 아기의 나심이라고 함을 바르게 읽은 표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정당하게 취하시는 분으로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 그렇게 말하는 것도 상대적인 인식에서 해석된 표적에 대한 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합리성 자체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의 진실함을 따른다면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계시를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아기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이심을 자기가 드러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그 판단가능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을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스스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 자신이심을 받음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고 또 편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누구나 받아 마땅한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의 보편성에 따라서 상대적인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의 사실을 정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정당한 사실로 받을 수 있는가 살피면서 야곱과 같이 돌배개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사실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권세도 있게 되어진 것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단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의 태양신의 생일을 빼앗아 왔다는 것으로 그 정당함이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러한 이방종교로 타락했다는 어리석은 또한 잘못된 생각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과 동일한 사람은 그 생일을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하신 날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고 정확한 날을 알 수 없다면 최선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에게 주신 제사장적 권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제사장적 권세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심과 그러한 것의 순종으로 우리의 상대적인 새로운 것이나 삶을 사실화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의 사역적 형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낼때에 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서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림은 적극적인 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적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적 입장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새롭게 구별하여 사실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그와 같은 점에서 합당하게 구별하여 축하하며 경배함이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써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상대적으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이 그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나심에서의 그 증거를 받은 목자들은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진실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마음에 둘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증거의 사실의 확실성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받게 하심의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고 하는 잘못된 지성들과 일그러진 이성들이 그 정당함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아니 알지 않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에 혼란을 가져다주며 평안이 없는 혼돈 속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기 예수의 나심의 표적을 바르게 바라보면서 주의 주신 평화가 함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주의 구주나심의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기뻐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사 52:7)을 재촉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눅2:8-20
구주가 나셨도다
이번 주일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와 감사드리는 성탄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 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을 증거함에 더욱 마음깊이 두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초로 하는 주일과 주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축하하는 성탄을 같이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또한 깊게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주가 나셨음을 기뻐하고 증거함에 있어서 유의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기가 나심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있으련만 주의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가 찬 그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영광이 저희를 비취매 그들이 두려워함과 천사의 증거로 두려워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음과 그리스도 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감에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하고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목자들에게 증거되어진 그 내용과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억하며 그 주의 천사의 전한 내용과 그로인한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림의 은혜의 자리가 그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기쁨과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신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세메이온)을 말씀하심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읽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없다는 것의 내용적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그 표적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잘못된 성탄에 대한 이해 즉 표적을 잘못 읽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도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을 잘못 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현대적인 신앙에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인본적으로 돌리는 잘못된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하나님을 자연의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 표현의 취상이 바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주 또는 자연의 자기표현의 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아실현정도의 모습이 가장 귀한 것이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신격화한 인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신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식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인으로 세계의 성인으로 말할 수 있다는 식에서 비로소 머물고 마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잘못된 기반은 하나님을 자연으로 가정한 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주장할 뿐 그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동의적인 차원이 아닌 자체적 차원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다른 진정한 성경에서의 아기의 나심이라고 함을 바르게 읽은 표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정당하게 취하시는 분으로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 그렇게 말하는 것도 상대적인 인식에서 해석된 표적에 대한 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합리성 자체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의 진실함을 따른다면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계시를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아기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이심을 자기가 드러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그 판단가능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을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스스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 자신이심을 받음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고 또 편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누구나 받아 마땅한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의 보편성에 따라서 상대적인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의 사실을 정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정당한 사실로 받을 수 있는가 살피면서 야곱과 같이 돌배개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사실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권세도 있게 되어진 것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단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의 태양신의 생일을 빼앗아 왔다는 것으로 그 정당함이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러한 이방종교로 타락했다는 어리석은 또한 잘못된 생각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과 동일한 사람은 그 생일을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하신 날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고 정확한 날을 알 수 없다면 최선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에게 주신 제사장적 권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제사장적 권세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심과 그러한 것의 순종으로 우리의 상대적인 새로운 것이나 삶을 사실화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의 사역적 형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낼때에 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서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림은 적극적인 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적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적 입장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새롭게 구별하여 사실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그와 같은 점에서 합당하게 구별하여 축하하며 경배함이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써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상대적으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이 그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나심에서의 그 증거를 받은 목자들은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진실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마음에 둘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증거의 사실의 확실성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받게 하심의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고 하는 잘못된 지성들과 일그러진 이성들이 그 정당함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아니 알지 않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에 혼란을 가져다주며 평안이 없는 혼돈 속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기 예수의 나심의 표적을 바르게 바라보면서 주의 주신 평화가 함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주의 구주나심의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기뻐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사 52:7)을 재촉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