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1월5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8:1-22
심히 창대하리라
일반적인 측면에서 사람들 자신들에게는 소신(所信)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만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당사자의 당면한 상대적인 경우에서는 그러한 소신도 여론적인 것이나 결과적 판단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바르게 판단되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치우친 가운데서의 판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판단들의 상이한 경우에는 서로에게 고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좀더 본문에서의 접근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소신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할 때에는 그 시비를 판단 받을 때에는 그 고통이라고 함은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신이라고 하는 것이 고통 받는 것보다도 또한 더 주목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중요함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이 한 말에 대하여서 그 입의 말이 광풍 같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하며 하나님이 심판을 굽게 하시겠느냐는 반문에서 출발하여서 욥의 자녀들이 득죄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그 죄에 붙이신 것이라고 하면서 욥도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판단의 기본은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돌아보시고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음에 대한 것은 여전히 욥이 불의한 사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0절의 말씀에서는 욥에게 말하기를 옛 사람에게 물으라고 함을 말함과 같이 경험 있는 자의 말이라고 함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개인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타당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1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옛 사람들의 경험이라고 함의 예를 들어서 상대적 진리성이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는 것과 갈대가 물없이 자라는 것과 같은 경험적 판단의 유용성과 확실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모습이라고 함은 소망이 없어진다고 함과 그 의지하는 것이라고 함은 거미줄과 같이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이서 있었을지라도 뽑히고 나면 그 자리도 모른체하고 다른 것이 나는 것과 같이 욥이 잘못을 범하여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판단을 받고 있는데, 욥 자신이 순전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욥의 입에 웃음이 채워지고 미워하는 자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을 들은 수아 사람 빌닷이 말을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욥의 고난이라고 함을 심히 창대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판단하고자 하는 빌닷의 모습과 그것의 분별이라고 함을 판단하며 증거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욥은 데만 사람과 빌닷 사람들에 대하여서 떼를 지은 객들로서 죽음의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그리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기서 5장 27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연구하여서 말함에 있어서 유익을 생각하라고 함에 대하여서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금 이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수아 사람 빌닷의 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내제적인 성찰이라고 하는 것 자체에서 비로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허용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것으로서 정당함을 입을 때에 내제적인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 학문적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있고 판단하는 엘리바스와 그를 잇고 있는 수아 사람 빌닷은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러한 말들을 통하여서 자신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서는 전혀 잘못하심이 없으면서도 그 종된 자로서의 이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이라고 함을 품군의 날로 비교하며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전적으로 내놓고 있는 가운데서 심히 창대하리라는 개념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그들의 판단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는 자들로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빌닷이라고 함은 ‘혼란스러운 사랑’, ‘뒤 섞여진 사랑’으로써 순수한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존재적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심히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결과만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품군과 같이 보이며 고난 속에 있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 거하는 자로서의 그 창대함을 이미 예정하신 가운데서 누리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판단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진정한 창대함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심히 창대케 하시는 참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