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2월 13, 2004

죄인이 받은 평안

2004년1월18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7:36-50
죄인이 받은 평안

어떤 일이나 그러한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그 일하는 방법에 있어서 ‘무작정 따라하기’라는 그러한 측면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함이 좀더 보편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소위 열린 중심의 마음과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드롬(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증후군'으로 순화. 스타 신드롬 또는 신드롬이 나타나다 또는 신드롬을 몰고 오다 또는 신드롬에 빠지다. 등의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을 규정하는 것으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현적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이해함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진다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평안함을 받게 되어짐이라는 그 뜻하심이 그러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미 주신 평안가운데서 평안을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합니다. 본문 3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과 40절에서 47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48절에서 5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는데 그곳에서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음을 보고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의 인식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이 여자에 대하여서 죄인인줄 알았을 것이라는 마음이 그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0절에서 47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시면서 빚진 자의 탕감의 여부와 그들의 중심적 표현이라고 함이 차이가 있음과 바리새인과 이 여인의 비교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48절에서 5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죄인인 그 여인에게 평안이 가라고 말씀하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이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평안’이라고 하는 것, 그 실재에 대하여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좋으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으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믿음과 인식이라고 함이 첫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에 대한 그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선한 선생으로 인식되어지는 사회적 정황이라고 할 때에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을 추구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적 인식의 확산이라고 함을 의식하여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함의 인식도 있지만 그러한 것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에 확실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바리새인의 고통이었고 또한 평안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만일 선지자라면’(눅 7:39) 이라는 측면의 확실성의 여부를 묻는 모습이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곳에 왔던 죄인인 한 여인의 신앙의 표현을 보면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자에서 한마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여기서 사랑의 많고 적음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 차이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많고 적다는 개념의 기준도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확신적인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많고 적음이라고 함이 상대적이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 재가가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 그 상대적 표현이면서도 실제적인 분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행한 것의 실제적 용납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며 또한 실제적인 현실 속에서의 평안의 실제를 주장할 수 있는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8절에서는 예수님이 죄사함을 얻었다고 함을 그 여인에게 말씀하심에 그곳에 있던 함께 앉은 자들이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지 않은가 라는 그러한 생각에서 반문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비합리적이면서도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그러한 표현은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아니하시는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며 합당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증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과 상관없이 자존하는 자기 정체성을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주기도의 의미를 마음에 두는 성도들이 그 확실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정황에 따라서 그러한 것에 편승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그러한 신드롬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평안의 실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으로써의 실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가운데 주어진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면서 타성에 젖은 자리에서 나와서 진정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그 긍휼하심 가운데 주시는 평안을 받아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실재는 현실적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인 고난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평안의 실재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거나 사라지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넘어서도 절대 합당하십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실제에서의 고통과 고민 속에서도 우겨쌈을 당할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평안의 실재는 그 믿는 자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며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써, ‘평안이 가라’ 말씀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기억하며 의지하여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귀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