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2월 13, 2004

내 백성을 보내라

2004년1월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5:1-23
내 백성을 보내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권위라고 함이 상당히 중요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권위라고 하는 것도 인증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가운데서 그 실재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라는 개념을 그러한 판단 가운데서 인정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야말로 잘못된 전근대적인 권위주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권위에 대한 판단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이 사회적 통념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념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상대적이라는 개념에서 그 제한적이면서도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마음에 둠이 좀더 보편적인 입장이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대자가 말씀하심도 형태적 상대적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실재적인 실제적인 증거로써 상대적 판단에 의한 본성적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심에 대한 증거를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2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함께 애굽왕 바로를 찾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하셨음과 그들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함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바로는 여호와는 누구관대 그 말을 들을 수 있는가 라는 반문과 함께 알지 못한다면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히브리 백성들이 게으르다는 것으로 임의적 규정을 하고 고역을 통해 거짓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도를 표현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바로의 의사표명은 그대로 애굽국정에 반영되어져서 히브리인들의 고역을 더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원인을 알고자 히브리인들의 패장이 알고자 했음에 그것은 모세와 아론이라고 함의 증거에 따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괴로움으로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기를 원함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온전한 순종이라고 함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하여서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이름으로 증거함에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심에 대하여서 아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마디로 권위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이는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에서만 국한되어지느냐 아니면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체적 중심에서 비로소 성립되어지는 것이냐의 이견의 모습과 그 고통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자기 합리화의 기본과 자기 권한이라고 함의 정당함은 기득권적인 즉 ‘취득시효’적인 개념의 법적 근거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이미 자신의 노예로 전락한 백성이라고 함에 그들의 존재적 정당함은 바로 자신에게 있으며 자신의 그러한 법적인 개념에 이의를 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모세와 아론의 증거에서 찾는다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자신은 히브리인들의 인식적 종속을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신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노예들의 판단이라고 할 때에 자신이 굳이 따라야 할 필요성과 또 그에 따른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바로의 생각이라고 하는 상대적 보편인식의 판단과 상관을 가지지 않는 자존의 절대의 권위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에 자신의 존재에 정직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더욱 그는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하심을 이루시기 위함이 출애굽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노아를 통하여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7)

셈이라는 뜻은 ‘이름’이란 뜻이요.. 셈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의 장막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의 장막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그의 장막 즉 미시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신다’라는 그 성소에 이스라엘이 머물게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마누엘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성도들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장막에 주의 택한 백성들이 모이며 목가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시대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적 계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증거하는 것 그것을 배척하며 또한 어리석게도 오히려 하나님의 판단을 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면서 우리의 삶에 주의 이름의 정당함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기를 사모할 때에 주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축복이 함께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