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1월4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3:1-22
호렙산의 모세
사회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상대적인 발상들을 구상할 수 있고 또한 쉼이라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소외되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자기의 유익으로 바꿀 수 있는 자리에 나감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고난이나 생각밖에 있는 뜻하지 않는 고난도 허락하심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자들을 권면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장소로써의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들 주의 뜻하심의 증거를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남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게 되며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고 있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대로 기억할 것과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모세가 행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모세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의 바름과 하나님 앞에서 성도와 보내심을 입은 종의 정체성 그리고 애굽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게 하실 것에 대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심의 말씀을 듣고 그 음성을 듣고 얼굴을 가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신을 신겨주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착용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을 벗음은 모든 기업이라고 함을 무르는 것으로 말하게 됩니다.
룻기에서 읽게 되어지는 ‘보아스’가 ‘룻’을 취하기 전에 더 가까운 친척으로서 결혼상대자를 구할 때에 그 기업을 무를 의사가 없는 가운데서 표현한 신을 벗는 것과 같은 모습은 이미 모세의 모습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으로 세우시는 가운데 순종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로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안력으로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그 실재적 구분에 대한 고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세는 자신이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라는 말씀을 감당함에 자신의 종으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자신이 누구관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라’고 하시면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을 통한 종의 실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셨음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사람들로 은혜를 입게 하실 것이라고 함과 그곳에서 빈손으로 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일반은총적인 지혜와 학문과 물질과 생의 전반이라고 함을 취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주 앞에서 구별하여 현실적인 실재라고 함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공부도 물질도 지혜도 모두 구별하여 취할 수 있는 그 풍성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풍요로움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즐거울 때나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억할 때에 때로는 황량한 사막을 걷고 있는 느낌과 실제로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고 함을 분명히 하면서 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과 판단 안에서 즐거워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했던 줄로 재어준 자신의 구역이 심히 아름답다고 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보내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종된 자로서의 정당함과 사역의 정당함을 따라서 우리의 작은 입술로도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의 실제를 증거하여야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세상의 지혜와 학문 그리고 세상의 보화라고 하는 것들도 구별하여서 취함에 따라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그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도록 하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때로는 나그네 된 자리에 선다고 하여도 주의 뜻하심을 잘 받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모세와 같이 잘 감당하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