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1월22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욥11:1-20
소발과 욥
어떤 것이든지 경험해보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라고 함을 다 해보아야만 말을 할 수 있다고 함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것도 상대적인 여지를 볼 때에 남겨두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작은 여지라고 함이 특별하게 전체를 주관하게 되어지는 그러한 것이 되어질 경우에는 전체라는 개념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일반적인 전체의 견해가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경우가 인지상정적인 입장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오늘 본문에서 판단의 여부와 그 중심적 증거가 된다는 점을 마음에 두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 대하여서 판단하며 언급하는 내용으로써 사람이 말이 많다고 하면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라는 말로써 욥의 앞서 진술한 내용을 일축하면서 주 앞에서 깨끗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책망하고 있고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알기 원한다고 하며 그의 지식이 광대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온전히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가두시며 개정(開廷)하면 누가 능히 막을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각이 없는 자는 들나귀 새끼 같은 자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르게 정하면 누워도 두려워하게 할 자 없겠고 사람이 그러한 자에게 첨을 주게 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고 함의 그 차이를 이해함이 옳은 것임이 그것입니다.
욥에 하나님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겠다고 함의 표현을 하고 있음에 대하여서 소발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한다는 그러한 점과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그러한 점을 인정하여서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의 자리에 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동병상병적인 동적적 동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지론과 불가해성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공통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온전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심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후자인 불가해성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철학자들은 불가지론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상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본성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의 확실성과 생각할 수 있고 인간적인 동의할 수 있는 것의 확실성은 제한적이면서도 확실하다는 것이 불가지론에서 말하는 인식의 확실성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이성적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소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는 주제에 판단하고 있는 욥의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욥은 불가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 알지 못하여서 무슨 연고로 하나님께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욥 10:2) 그러면서도 욥은 말하기를 ‘이 뜻이 주께 있은 줄 내가 아나이다’(욥 10:13)
전능한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로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능자이시기에 상대적인 인간의 이해로도 말씀하심에 따른 이해가 있게 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부분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가운데서 본문에서 소발의 판단과 같이 들나귀 새끼와 같이 세상물정 모르는 존재가 경험의 지각이 없는 존재가 위험한 허망한 삶의 자리에서의 죄악의 표현이 됨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어짐 심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소발의 판단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즐거움의 참새적인 지절거림이라고 하는 것으로 그 의미적 실제의 판단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도 말씀하심에 따라 부분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한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에 있음에 대한 판단으로써의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함을 담아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써의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잘 인용하지 못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판단한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 그의 이름의 뜻을 보면 즐거움의 사람 그리고 참새라는 뜻과 거만한 이라는 뜻을 가진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찌 아는가 하는 그러한 것으로 언어의 유희적 개념으로 나서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이러한 것은 성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러한 것은 그들 자신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판단을 담아내는 슬픈 말쟁이들의 받을 심판이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것을 보며 즐거워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남의 잘못과 실수라는 개념에서 우리의 기득권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증거라고 함에 대한 확실성이 없음에 대한 판단에서 자유하며 또한 부분적인 지식이면서도 하나님의 실제적인 계시의 증거자로 세우셨음을 기억하고 우리의 작은 입과 중심으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받으신 바 되어지는 귀한 은혜가 하나님의 자랑이었던 욥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