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2월1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8:22-39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요즘에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사이버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반영하기도하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말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이버 공간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역사적인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아직 미숙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그 준비된 자료라고 하는 것의 신빙성과 권위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여론적인입장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단편적 현실적 사실의 공유와 전달의 표현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혁명적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실제의 삶을 위한 것으로써의 간접적인 것으로써의 실제성을 가질 뿐 현실과 혼동되어질 수 있는 것이나 대체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 많은 피해사례가 있게 되어진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 즉 중요시 되어지는 전달의 편리성과 정확성을 말하면서도 사실 전자우편의 주소가 잘못 기재되어서 잘못 전달되어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산물로서 총아적인 입장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요 그 자체적 정체성의 주소도 역시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함이 우리의 삶을 바로 보는 시각의 하나가 되어질 것입니다.
즉 ‘정체성의 주소’라고 함을 말할 때에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정체성의 주소’라고 하는 것도 살펴보는 것이 주의 뜻하심의 한 부분이며 지혜로서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시고 배를 타고 가시는 도중에 주무심에 있어서 광풍으로 인해 배에 물이 차고 죽게 되어짐에 주께 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바다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심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시는 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의문을 묻고 있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하셨음에 대하여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거라사인의 땅에서 있게 되어지는 귀신들린 자와의 담화와 그를 고치심과 예수님에 대한 배척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두 부분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는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주목하게 되어지며 비교되어지는 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믿음과 그 믿음의 주소라고 함의 불확실한 모습이라고 하는 판단과 거라사에 귀신들린 자의 주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상대적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들로서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의 증거되어지며 예언되어진 구주이심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라사인의 말에서 읽게 되어지는 귀신들린 자로서의 언급은 귀신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즉 귀신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들이 무저갱에 갇힐 것에 대하여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위적인 자위성 즉 부정되어지고 정당함을 얻지 못한 가운데서 그들의 행위가 존속할 것에 대한 것을 의지하며 여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돼지 떼에게 귀신 자신들이 들어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후에 주님을 떠나도록 배척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그러한 의도적 발상과 주께 제안하는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하셨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함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단의 주체성이 이미 주께 있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이미 결박되어진 자들이요 그들의 삐뚤어진 자의성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것도 부정의 존재로서 허락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주의 뜻하심이 온전히 세워짐을 사단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훼방하고자 하는 상대적 뜻함이 허용되어지고 오히려 그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주의 구원하심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로서 주의 성도들과 형제로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우리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의 실제적인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주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심을 믿는 그 자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사단도 이러한 것을 알고 있지만 주께서 그들의 그러한 알고 있다는 것에 정당함을 결코 부여하지 않으심에 있어서 사단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정당성의 실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도 인정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자신들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절대자이심과 자신의 절대의 정당함으로서 우리 성도들에게 구주이심에 대한 믿음을 주셨으니 상대적이라는 불확실성을 넘어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심과 구주이심에 대한 실제적인 확신을 가지는 자리에 서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진정한 현주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참된 믿음으로 주 앞에서 주의 뜻하심을 드러내며 증거하시는 귀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합당히 받으심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