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후 3:1-17
고통하는 때와 성경
한번은 모 도서관에서 고통과 죽음과 같은 인생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이라고 하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다는 것과, 또 일반 서점에서 읽게 되는 사람들의 인식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부정에 대응하는 가운데서의 긍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재치있는 처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단 현대인의 인식의 한 단면이지만, 그래도 인지상정적 입장에서 그 고통의 문제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노력과 긍정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하는 것의 지혜를 담은 지식들의 모습은 인생사에서 통념적인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개념적 실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예외는 아니라고 할 때에 과연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온유함으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의 소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중심에서 오늘 본문을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을 말하며 강조하여 이것을 알라는 말을 하고 있고 그 내용적 기술이 이어짐을 봅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임을 말하며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며 욕심에 끌려서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며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과 같이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서 주께서 사도 바울을 건지셨음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과 악한 사람과 속이는 자들의 행보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일에 거하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욱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것도 말씀하시고 있어서 성경을 알았다는 말과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면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는 예레미야의 증거와 모세의 증거가 같이 증거되어지고, 호세아적 말씀들이 동일한 증거적 말씀으로 나타나며 배경이 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며 증거합니다.
먼저 예레미야와 모세의 증거를 먼저 주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심은 인류의 범죄때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하와가 진정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마음에 받고 있었다면, 상대적인 합리성에 따른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어도 그렇게 크게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상대적 당위성을 비로소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뱀이 유혹하게 되는 그러한 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 개연적 입장이며 수용당연성도 재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 그 당시나 현실에서도 납득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 상대적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가 말씀하신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의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을 따르지 않은 것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실적 실존에 나가는 것이며 고통의 시작적 기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게 되는 종말 즉 시작과 이미라는 개념으로서의 시작을 나타내시는 주의 계시적 사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인 여러가지 재고되어질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의 요소가 있으나 이미 성립과 실존에 대한 정당성 시비에서 부정적 사실을 말하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만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눈물의 선지자로서 예레미야가 창세기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에 대한 사실적 개념이 그 왕국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있음을 인한 그 고통의 기원을 지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읽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세를 언급하면서 그 종말적 입장에 고통의 때를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2절 말씀에서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도 않는다는 것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계명에 대한 인륜적 약속있는 첫계명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서 애굽의 인식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이는 한역인데 이집트를 말하며 이는 '미즈라임'을 음역한 것으로서 이 미즈라임은 함의 아들입니다. 이 함은 노아의 아비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였습니다. 술취한 노아의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부모의 존중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공경하라고 하심과 그에 따른 것에 있기 때문에 그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판단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두어야 했던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모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과 그것에 대한 시정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좀더 바람직하도록 함이 자식된 도리요, 그 수치를 감추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판단이 되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최종적인 본질적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비웃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대표자로서 애굽왕 바로는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말을 한 것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의 시대의 고통의 주체가 될 뿐이며 다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출애굽했을 때에 증거되어진 미리암의 노래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출 15장, 출 15:21)를 통해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출애굽 7장 8절에서 16절에서는 나타나는 모세가 명하도록 하여서 아론이 던진 지팡이가 뱀이 되어지고 그 뱀이 애굽의 술사의 만든 뱀을 삼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인 8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딤후 3:8~9)
즉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증거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6절과 7절에 말씀과 동일하게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음탕한 고멜이 신랑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미혹되어진 것은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어리석은 여자로 비교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에 있었던 한 사건적 입장을 언급할 수 있으나 이처럼 주의 말씀의 한 증거적 차원의 한 구별되어진 예표적인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상대적인 생각과 보편인식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임의적인 조작적 합리성에 자신과 다른이들을 기만하는 것으로 만족의 사실을 강요받거나 자인하기를 강요받을 뿐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참고). 남을 속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합의된 이성적 당위성에서 실제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성경을 디모데가 알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자존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할 때에 고통이 있다는 것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성경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 지혜의 실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찌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서 유대인들을 이김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행 18:28), 그것을 주목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자신의 계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자신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합당하게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의 중심이었음을 읽게 되며 그것의 풀어서 생활적 개념으로 증거되어진 것이 목회서신의 실존적 증거들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죽는다 산다는 개념의 상대적 실존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기억할 때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바른 성경해석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서 성경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었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증거로 인해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절대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러한 재가되어진 것으로서의 판단하에서 자존의 절대자의 영광을 담은 계시로서의 '말씀 스스로의 증거'(성경의 자증, Autopistia)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상대적인 여지와 비판의 요소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께서 그러한 형식에 재가를 하셔서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에서 상대적인 여지로서 사실을 말하지 못할 때에도 사실화시킬 수 있는 근거적 기준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링크되어지는 글 본론 2번의 4)번참고 성경의보편성이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즉 고통의 때에 어떤 인위적인 자위적 개념으로서의 처세를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고통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주어지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사실의 실존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통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 본래적 기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에 따른 실재와 실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를 통한 아론의 지팡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도록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도록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이 그 실제의식이 없어서 신학적인 임의적 합리성의 재구성을 신앙과 신학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 개념도 없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여지와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에서 이해되어지고 규정되어지는 자유의 개념으로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는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추구함에 있어서는 학문의 깊이와 성립이 있을 수있으나 그것의 사실의 실존과 존재의 정당함은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초도 준비되어지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다원적인 개념이나 실증적 개념에서 성경을 아무리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여도, 구원을 받기 위한 실증적 목적으로서 비로소 말하고 증거하며 배운다고 하여도, 그러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여도, 기독교는 구원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개념없이 구원의 실증적 판단은 그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실재 개념이 없으면, 그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의 증명적 신앙과 신에 대한 개념으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과 그 사실의 실존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라는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는 고통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의 합리적 정당성만을 찾고 있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증거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 자기 계시를 바르게 알아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의식을 찾는 가운데 진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이미' 지난 자로서 '아직'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실제적으로 '항상 잔치하는 자들'(잠 15:15)로서 주 앞에 세워지시는 귀한 은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심의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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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