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07, 2007

직임과 명령이해

2007년 5월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신 11:1-7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

다원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그 사태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세상 사는 하나의 지혜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앞서 언급한 이 말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에 따른 윤리와 인식 그리고 상대적 여지로서의 개선을 말한다고 할 때에 기존사회에 대한 대화하다는 것으로서의 '데모'(demo)적 개념은 과격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대화라는 개념이 그것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대화를 위한 협력과 상황에 적응을 위한 노력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추이에 있어서 유독히, 교회의 질서이해에 대하여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과 그러한 입장에서 개혁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판단에 따른 상대적 여지를 통한 통렬한 비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 우리 성도들로서의 입장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과 본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 말씀에서는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들이 알지 못하지만 앞선 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광야에서의 자녀세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셨던 재앙들과 모세의 홍해의 기적 그리고 광야생활에서의 있었던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모든 목도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시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직임과 명령을 지키라고 하심에 있어서 진정으로 그렇게 순종할 수 있는 중심은 어떤 것이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것을 당시, 지금 시점에서 말씀하심은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주로 모압지방에서 주어지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모압지방이라고 함의 특색은 참으로 오늘날에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모압지방이란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음란한 세대를 지칭할 수 있는 구별된 지역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취한 가운데서 그 딸들과 동침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민족의 이름으로 지칭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음란한 곳으로서 황량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발람과 발락의 저주하려고 했던 곳이며 실제적으로 저주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그 이어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에 들게했던 것이 그 지역의 특성인 것입니다.(민 22장 25장참고)

음란한 세대는 어떤 윤리적 통념적인 것보다도 자신들의 임의적 개념의 윤리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간섭받기 싫고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꾸어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있을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타락한 본능적 개념에 충실히 행하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는 솔직하고 사실인 것과 같이 자신을 기만하는데 익숙해진 것을 말할 수도 있는 정황과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할 때에, 표면적으로는 순종해야 하는 당위성에서 임의적으로라도 순종하겠지만 내면적인 공허함에서 결국 순종의 사실이라는 개념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광야세대에서 자라난 자녀들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고생과 함께 '잔뼈가 굵은 자들'로서 세상 물정이라고 하는 것에 아주 눈이 뜨여진 것을 말할 수 있는데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의 직임과 그 직임을 맡은 자로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은 상황적으로 당연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며 그들이 순종의 사실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중심이 읽혀질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모세는 단도직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직임과 그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과 그 자녀들에게 지난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앞서 언급되어지고 읽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안으로서의 답변이 되어짐을 또한 읽을 수 있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는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신 11:6)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직임에 대한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한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했던 자는 고라와 심지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레위지파인 고로 모세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여야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더욱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음을 인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러한 여론적 입장이 있는 때에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세의 손을 들어주시고 반역한 자들은 땅에 삼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상황만 본다면 미리암 덕분에 모세도 목숨을 건졌고 그러한 가운데서 지도자가 되었으면 누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도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도 지도자로서 그들의 입장에 따라 백성을 이끌어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실 때에 달리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음과 모세를 통하여서 인도하심에서 다른 말씀하심이 없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적 당위성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자존적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그 당위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직임에 대한 상대적 여지만으로써 그 직임의 실존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자녀된 세대들의 순종하여야 할 직임을 맡은 자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질서에 대한 임의적 반목일 경우, 그것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과 그것에 대한 책망과 징벌이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을 판단함에 있어서, 교회의 질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 차이라는 개념만으로 개혁을 말한다는 명분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생각하는 잘못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실제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개연적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으로써 하나의 진리가 아닌 의견(opinion)으로 교회개혁의 사실을 말하려는 진정 어리석음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 역사 이해에 있어서 상대적인 정황이라는 개념으로만 주목하는 가운데서,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목으로만 비로소 생각하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기존 교회의 질서에 반목하는 것이 어떤 마냥 의로운 투사인 것과 같이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교 가톨릭에서 신교가 나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자 신교가 탄생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의식의 사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적 존재의 사실성을 비로소 말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구별하여 질서에 대한 견해를 달리한 것이 합당하며 그것이 또한 신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 구교에서의 '성직매매'가 있었는데, 이것은 실수에 따른 윤리적 잘못이라는 개념과 다시는 그런 행위가 없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봉합되어질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직임에 대하여서 바르게 기억하지 않은 자들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것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에 대한 불순종으로서 죄악인 것입니다.

윤리적 또한 연약함에서 있을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으나, 주께 불순종으로서의 성직매매라는 행위는 분명 죄악이며 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고 그것은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직에 대한 직임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인 개념과 임의적 절대성을 가질 뿐 진정한 성직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존의 절대자로 믿었더라면 성직을 가지고 그 특권을 가지고 재정을 채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링크되어지는 글 각주1번참고) 그러한 하나님의 성직을 사고 파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직임에 대한 개념이 욕정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습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질서와 그 가운데서의 직임은 구별되어진 것으로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고 그 교회질서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구별하여 주의 몸된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실제적 중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교의 교회의 질서로서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있게되어지는 직임이라고 하는 것에 상대성에 절대성을 임의적으로 부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그 질서적 차원에서 그것을 시행하도록 질서가운데 있게되어지는 종들의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믿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뜻하심이 그것을 통해서도 바르게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과 그 기도의 사실을 믿는 것이 옳은 모습인 것입니다.

명령을 지킴에 대하여서

주의 명령을 지키도록 말씀하시는 그 배경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외에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알라'고 하심(신 4:39)하에서 십계명이 주어졌음을 모세가 증거하고 있는데(신 5:5~22),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자존의 절대자께서 상대적인 인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그들의 잘못까지도 구별하셔서 증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주의 기록된 말씀하심을 통해서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말씀을 받는 가운데 그 주의 말씀으로 듣고 명령을 지키는 순종의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전하는 자가 절대 실수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납득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전하는 자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만, 실수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것까지도 성도들이 주의 말씀 하심 안에서 선하게 달리 받을 수 있다는 측면과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심안에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로서의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제사장적 권세가 주의 말씀하심을 구별하여 받음의 사실적 정당함을 가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음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적 영광으로서 그 직임적 권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인데 왕적, 선지자적, 제사장적 권세가 성도들에게 나타나고, 나타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경우에는 상대적 보편상식의 판단하에서 자유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의 비판이 정당한 것과 같이 기만되어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설교 말씀을 비롯한 주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을 따라야만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 여지가 있음에 대하여서 앞서 언급한 중심과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순종의 사실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해제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임의적 당위성에 따라서 순종함의 부당함을 잘못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사태파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함을 주목할 때에는 그러한 상식보편이나 거기서 거기인 철학적 당위성은 오히려 주의 질서적 개념에서의 직임과 그 명령의 순종의 사실에 동의하고 다른 당위성을 말하는 핑계를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나 주의 가르침으로서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안에서 실제화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의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순종함에 합당한 것입니다. 상황적 정황적 보편상식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오히려 그것들을 판단함의 근거적 사실로 자리매김되어짐의 실존적 정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의 정하신 직임과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께서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판단을 받지않으시는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계시하셨고, '항상 예수님께 예만 된다'(고후 1:19)는 그 말씀에 따라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상대적인 것을 사실화 시키는 가운데서, 상식적인 보편적 철학적 당위성에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별하고 사실화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적 권세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인식과 여러가지 경우에 따라서 교회에 개혁이라는 임의적 입장을 통해서 형제들을 라가라하는 가운데 주의 판단을 받는 어리석은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왕같은 제사장들로서의 성도임을 기억하여 그 사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때에도 주의 질서와 그에 따른 직임을 존중하고 바르게 이해하여 그러한 직임을 맡은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회중 가운데서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직임과 명령을 지키는 종들로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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