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13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2:13-25
죽음을 자초한 악한 종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구별하여주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생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한다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은총에서 있게되어지는 사람들의 의식적 지혜의 발상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적 개념이나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특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면서도 일반은총적 개념의 사실 속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가능하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러한 입장에서 재고되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구성적 경향의 '많음'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정당한 인식의 개체적 소수로서의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깨닫게 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작은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실제적인 정당함을 고려하지 않은 많은 말들보다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인 개념은 기만적 요소로서 그 판단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만나서 수넴여인 아비삭 여인을 아도니아 자신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밧세바는 좋다며 솔로몬에게 말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일로 말하려고 솔로몬에게 나아가니 솔로몬이 어미에게 예를 갖추고 그를 우편에 앉히는 가운데서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청을 솔로몬에게 말하자 솔로몬은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하고 아도니아를 죽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아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악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그것과 다른 선한 종들로서의 지혜를 구함과 그로 인한 충성으로 수종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아의 구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솔로몬이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이 왕위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의 왕위 계승권의 실재를 위해 그 왕국의 질서적 당위성을 따라서 말하는 아주 간교함이 배여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의 인식의 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그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과 거짓을 주목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전반적인 측면을 상식에서만 본다면 별로 흠이 없는 겸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진정한 상식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재적인 당위성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아는 그러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것입니다.
(상식이 스스로 실존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상대적인 존재인 한 그 자체적 정당함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납득당위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적 당위성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실존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아의 진술 속에서 '내 것이었고'라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기존사실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외적인 상황의 반전으로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당위성에 상대적으로 밀렸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황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형식적인 도의적으로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예를 갖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적 반전 정도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정한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짓을 전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 또는 '모든', 이라는 말들은 상황적 차원에서 특정한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개체적인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판단하에 있는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정황하에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서 상황논리적 판단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앞에서의 실재의식과 그 실제적 판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이 참되지 못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악함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아의 이러한 개념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의 근거인 것과같이 자신을 기만한 가운데서 밧세바에게 그 자신의 왕위를 위한 당위성을 위하여서 인식의 상황적 변화를 위하여서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함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의 왕위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으로서 자신을 세울 때에 결정적으로 솔로몬에게 지게 된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타던 노새에 앉았기 때문이며, 다윗의 재가를 말하는 정당함이 아도니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작은 하나가 모든 민심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 인식을 솔로몬에게 두는 것이 옳다는 당위성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여전히 남았고 또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비 다윗의 시종을 들었던 아내와도 같은 수넴여인 아비삭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아비삭'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잘못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삭 : 빗나간..'이라는 뜻과 '아비: 아버지'라는 말들이 합성되어진 이름으로서의 아비삭의 이름을 보는데 그것은 그 이름의 존재적 증거가 아도니아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왕위로 세운 아버지는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아도니아와 결혼해도 상대적 윤리성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바른 아버지 다윗의 영광은 아도니아에게 있는 것이라는 그러한 자기 정당함을 세상에 알려 결국 아도니아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함을 나타내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솔로몬은 왕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도니아의 악함에 대하여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아도니아도 넷째 아들로서 앞선 세 명의 형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왕위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왕이 되려는 노력과 그것을 위한 질서를 따른 가운데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윤리적 잘못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상황적 개념에서만 임의적으로 보편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더욱 하나님의 실제적 재가라는 특수상황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는 그러한 생각 일변도라는 것은 오히려 보편을 가장한 개체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의 절대성의 부여와 그에 따른 사실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진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불특정 시기와 장소와 사람들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의 한 형태적이라는 개체적 동의의 당위성을 얻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당위성으로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강변하기에는 편견으로서의 실존적 판단하에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재가 있는 하나님의 뜻하심의 사실을 반전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삭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윗과 동침하지 않은 가운데서 윤리적 입장의 법적인 측면으로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있도록 천거되어진 자로서 자신의 아비의 영광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를 상관하겠다는 것은 부모의 하체를 취하겠다는 것,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롱하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모습과 동일한 자리에 서는 죄'(창 9:21~25)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같이 종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왕상 2: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한 바로 직후에 있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사면이라든지 어떤 그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아도니아에게 그렇게까지 행하지 않는 것이 솔로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아도니아도 그러한 점을 마음에 두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모를리도 없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강경책을 두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왕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합당한 당위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시비하겠다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용서할 권한이 솔로몬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으로서 죄없다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하에 솔로몬 자신이 임의적으로 무죄를 선포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도나이의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가만히 주의 양무리에 들어온 자'를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측면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양들을 약탈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인 자신의 질서적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1:4)
'아도니아'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하신 말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아도니아처럼 상대적인 정당함만 생각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구별을 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들어와 자신의 입장을 위한 색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그리고 주의 양들을 잘못 먹이고 있는 자신의 양들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상식도 없는 것이 신앙이다'고 함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와 사실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인식함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솔로몬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모습이 되어짐을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아도니아와 같은 잘못된 거짓되고 악한 죽음을 부르는 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서 때를 따라서 주의 영혼들과 굶주린 영혼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왕상 2:13-25
죽음을 자초한 악한 종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구별하여주심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거나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인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적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생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말한다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은총에서 있게되어지는 사람들의 의식적 지혜의 발상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장소적 개념이나 또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특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면서도 일반은총적 개념의 사실 속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가능하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러한 입장에서 재고되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구성적 경향의 '많음'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정당한 인식의 개체적 소수로서의 그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일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깨닫게 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작은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실제적인 정당함을 고려하지 않은 많은 말들보다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적인 개념은 기만적 요소로서 그 판단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밧세바를 만나서 수넴여인 아비삭 여인을 아도니아 자신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밧세바는 좋다며 솔로몬에게 말하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일로 말하려고 솔로몬에게 나아가니 솔로몬이 어미에게 예를 갖추고 그를 우편에 앉히는 가운데서 밧세바가 아도니아의 청을 솔로몬에게 말하자 솔로몬은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라는 말과 함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하고 아도니아를 죽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도니아가 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악함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그것과 다른 선한 종들로서의 지혜를 구함과 그로 인한 충성으로 수종들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며 또한 증거합니다.
먼저, 아도니아의 구한 것에 대하여
이것은 솔로몬이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이 왕위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의 왕위 계승권의 실재를 위해 그 왕국의 질서적 당위성을 따라서 말하는 아주 간교함이 배여있는 것입니다.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은 15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그의 인식의 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고 그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과 거짓을 주목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왕상 2:15)
전반적인 측면을 상식에서만 본다면 별로 흠이 없는 겸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이 진정한 상식으로서의 실존적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재적인 당위성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도니아는 그러한 개념이 아직도 없는 것입니다.
(상식이 스스로 실존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는한 상대적인 존재인 한 그 자체적 정당함을 취할 수 없는 가운데서 절대를 의식하는 가운데서 납득당위성을 상대적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속성적 당위성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실존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아의 진술 속에서 '내 것이었고'라는 말은 '완료형'으로서 기존사실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외적인 상황의 반전으로서의 하나님 여호와의 당위성에 상대적으로 밀렸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황적 기득권이라고 하는 것을 형식적인 도의적으로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 예를 갖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적 반전 정도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진정한 당위성을 생각하지 않는 거짓을 전제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 또는 '모든', 이라는 말들은 상황적 차원에서 특정한 전체를 말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개체적인 개념으로도 말할 수 있는 판단하에 있는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보편을 지칭하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재가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적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정황하에 비로소 동일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의견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면 그것은 사실로서 상황논리적 판단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앞에서의 실재의식과 그 실제적 판단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이 참되지 못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악함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아의 이러한 개념없음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의 근거인 것과같이 자신을 기만한 가운데서 밧세바에게 그 자신의 왕위를 위한 당위성을 위하여서 인식의 상황적 변화를 위하여서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넴여인 아비삭을 구함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의 왕위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으로서 자신을 세울 때에 결정적으로 솔로몬에게 지게 된 것은, 솔로몬이 다윗의 타던 노새에 앉았기 때문이며, 다윗의 재가를 말하는 정당함이 아도니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작은 하나가 모든 민심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적 인식을 솔로몬에게 두는 것이 옳다는 당위성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여전히 남았고 또한 가장 유력한 것은 아비 다윗의 시종을 들었던 아내와도 같은 수넴여인 아비삭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의미는 '아비삭'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잘못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삭 : 빗나간..'이라는 뜻과 '아비: 아버지'라는 말들이 합성되어진 이름으로서의 아비삭의 이름을 보는데 그것은 그 이름의 존재적 증거가 아도니아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왕위로 세운 아버지는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아비삭과 동침을 하지 않은 가운데서는 아도니아와 결혼해도 상대적 윤리성에서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과 바른 아버지 다윗의 영광은 아도니아에게 있는 것이라는 그러한 자기 정당함을 세상에 알려 결국 아도니아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함을 나타내려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솔로몬은 왕위를 구하는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의 죽음이 마땅함을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도니아의 악함에 대하여서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아도니아도 넷째 아들로서 앞선 세 명의 형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왕위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납득되어진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왕이 되려는 노력과 그것을 위한 질서를 따른 가운데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윤리적 잘못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실체라고 하는 것이 상황적 개념에서만 임의적으로 보편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에,더욱 하나님의 실제적 재가라는 특수상황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는 그러한 생각 일변도라는 것은 오히려 보편을 가장한 개체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재가의 절대성의 부여와 그에 따른 사실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 선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진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불특정 시기와 장소와 사람들의 인식의 동의적 차원의 한 형태적이라는 개체적 동의의 당위성을 얻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상대적인 당위성으로서 사실을 말하기에는 강변하기에는 편견으로서의 실존적 판단하에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재가 있는 하나님의 뜻하심의 사실을 반전시키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삭을 구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윗과 동침하지 않은 가운데서 윤리적 입장의 법적인 측면으로서의 당위성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비삭이 다윗과 성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있도록 천거되어진 자로서 자신의 아비의 영광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자를 상관하겠다는 것은 부모의 하체를 취하겠다는 것, 부모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조롱하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모습과 동일한 자리에 서는 죄'(창 9:21~25)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과 같이 종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왕상 2: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즉위한 바로 직후에 있게 되어지는 자의 모습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특별사면이라든지 어떤 그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아도니아에게 그렇게까지 행하지 않는 것이 솔로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아도니아도 그러한 점을 마음에 두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며 그것을 모를리도 없는 솔로몬의 입장에서 강경책을 두지 않는 것이 상황적으로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왕위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합당한 당위성이 있는데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시비하겠다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용서할 권한이 솔로몬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실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것으로서 죄없다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하에 솔로몬 자신이 임의적으로 무죄를 선포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아도나이의 이러한 악한 지혜의 행보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가만히 주의 양무리에 들어온 자'를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측면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양들을 약탈하려고하는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인 자신의 질서적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다서 1:4)
'아도니아'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하신 말씀을 받는 자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아도니아처럼 상대적인 정당함만 생각하고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구별을 하고 그것의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들어와 자신의 입장을 위한 색욕적 개념으로 교회를 이해하려는 그리고 주의 양들을 잘못 먹이고 있는 자신의 양들로 전락시키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러한 자들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의 입장은 '상식도 없는 것이 신앙이다'고 함을 비로소 말하는 것은 아니라 상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실존적 의미와 사실이 성립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인식함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솔로몬으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한 모습이 되어짐을 믿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아도니아와 같은 잘못된 거짓되고 악한 죽음을 부르는 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실제적인 섬김을 통해서 때를 따라서 주의 영혼들과 굶주린 영혼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귀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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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