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4월 04, 2005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2005년 4월 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암2:1-16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힘과 함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힘의 자랑이라고 할 때에 어떤 물건을 들어올리는 그러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서 그 들어올림으로 인한 힘의 자랑을 검증받게 되어지는 것에 앞서는 것은 그 들어올리는 것으로서의 그 물건의 재질이나 이해에 대하여서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모양의 물건이라고 하여도 더 무거울 수 있는 것이 사실이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무게의 차이가 변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임의적으로 힘에 대한 과시를 나타내는 경우에 있어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고 본의 아니라고 하여도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넌센스적인 언급이라고 함을 예로 든다면 자기 용량에 맞는 무개의 바벨을 누운채로 들어올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는 그 바벨을 떨어뜨려서 목이나 가슴을 다치게 되어질 수 있는 위험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의 존재적 증거는 ‘짐’ 또는 ‘짐 지는 자’라는 뜻의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인생에게 주어지는 임무로서의 짐이라고 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판단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 본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압에 대하여서 그들의 서너 가지 죄를 인하여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다에 대하여서 그들의 서너 가지 죄에 대하여서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열조를 따라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의 행한 바에 대하여서 책망하시고 있으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하심에 대한 것을 더 자세히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음에 대한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유다와 이스라엘을 누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피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으며 그 도망하는 자들이 있게 하심에서도 그들의 용사되어진 자들의 존재적 사실이 부끄럽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수레에 담은 곡식 단이라고 하는 것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 짐이라고 함이 그들을 결코 자유롭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짐은 지기 쉬울 것이며 쉼이 있는 짐’(마 11:28~30)이 되어질 것을 예표적 그 당시의 존재적 증거자로서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본문 2장은 1장과 연관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문맥적인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아모스의 소개와 그의 보내심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고 이방의 받을 심판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가운데서 2장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방의 심판받음이라고 하는 것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같이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동일한 판단 받음이라고 하는 것을 본문에서 읽어내는 것이 관건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아모스 1장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족속과 2장 첫 부분에 언급한 족속은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고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과 존재에 대한 분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암몬자손(암 1:13)과 모압자손(암 2:1)이 그들인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들의 후손들로서 백성을 이룬 자들입니다. 조카 롯은 상대적으로 상당한 상식이 있는 그러한 분별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정황적 이로움을 생각하는 자이었는데 그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유황불로 멸하게 되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소알 성읍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딸들은 생각했습니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창 19:31~32)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9:1)고 하심의 주의 뜻하심을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에 관계없이 타락한 의지와 본능적 정서가 하나님의 정하신 말씀의 뜻하심을 따르지 않는 가운데서의, 인종을 전하자는, 임의적 당위성을 따르기로 하여 신앙적인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자신들의 아버지의 삼촌인 아브라함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 자들이 아닌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정욕적인 것은 신앙적 입장의 유순한 표현을 슬로건으로 내걸어서 그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신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질 수 있는 은혜로운 짐이 되어지는데 그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하여서 생각하여 임의적으로 자취하는 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그 짐이 그들을 눌러버리게 된다는 것으로 그들의 죄에 대한 회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서너 가지라는 죄의 상대적인 개체적 사실을 분명한 심판받을 사실로써 규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달란트와 같은 것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성도의 믿음의 뜻하심을 수행하게 되어지는 그 짐이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주장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그들의 눌리게 되어지는 짐으로써 나타나며 하나님 앞에서 곡식의 자라남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러한 불모의 자리로 하나님께 강퍅한 자리에서의 심판을 자초하는 자리에로 나가게 되어지는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심판의 선취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압과 암몬 족속 앞서 있게 되어지는 이방 족속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달란트와 주의 주신 뜻하심을 이룸을 우습게 여기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비방하며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던 자들로서 그 자초한 짐에 깔리게 되어지는 자들로서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웃시아 왕을 비롯한 상당한 주의 은혜를 입은 자리에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발상으로 행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에 하나님의 목장에 있는 양무리들로서 택하심의 징표를 받지 못하는 자로서 판단 받을 수 있음을 놓고 회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의 입장에서는 그 목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그 때 그들이 하는 일이 그들의 목장에서 양이나 가축에 표하는 자입니다. 양으로서의 합당한 것의 관리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자인데 이것은 주의 짐을 지며 주의 뜻하심 안에서 쉼의 정체성을 찾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히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신 바 그들이 받게 되어질 달란트와 그들의 행할 일들과 같은 짐을 마음에 바르게 두지 못했던 것이며 거짓 것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후에 히스기야와 같이 선왕도 북쪽 이스라엘 왕과 같이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 전장에 나갔다가 죽을뻔한 사실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전에도 그러한 상관관계에서 분명하지 못한 거짓된 것을 따랐던 전적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그들의 흥왕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입장에서는 선지자들이 굳이 말함에 있어서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지는 가지지 못하는 자들이었고 적극적으로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하는 그러한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짐뿐만 아니라 주 앞에서 그들의 합당한 짐을 지고 증거하는 선지자들의 짐을 벗기는 악한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총체적인 주의 판단하심을 수레에 눌릴 자들의 모습으로 그들의 강퍅해진 그 중심에 ‘은혜 받을 자’의 자리에서 제하여짐에 대한 판단하심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레에 흙이 눌리게 되어지는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는 인생들이 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임의적 당위성으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임의적으로 신앙생활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자들도 그러한 이방인과 같이 판단을 받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스스로 자신이 판단하되 그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의 성격이 하나님의 자존적 형상의 지음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의식적으로 인식적으로 인정하여야 하면서도 그것을 행치 아니하는 불순종이라는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죄의 짐이 벗겨지고 주의 주신 믿음의 주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자원하는 마음에서 지는 짐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들과 같이 심판에 이르게 되어지는 짐으로써 나타난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으로 여러 종교의 서로 포용성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의 선하심과 구원하심의 자존적 유일하심에 대하여서 마음에 두지 않거나 말하지 못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적 유일한 구원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그 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그 짐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구주이심에 대한 사실을 말할 때에 말할 수 있을 때에 내려놓게 되어지며 그 강퍅함에서 벗어나서 은혜 받을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30)고 하신 주님의 말씀하심을 따라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의 해야 될 의무라고 함이 진정 쉬운 것이며 쉼을 주시는 것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주님 안에서 인내하며, 죄짐이 아닌, 주의 뜻에 합당한 짐을 지는 자로서의 행복이 주의 축복으로 나타나는 귀한 은혜가 있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주의 고난을 남은 육체에 채우는 종의 심정과 같이 주의 받으신 바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