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5:1-13
너희도 서로 받으라
Accept one another
상식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지나치지 않고 정도껏 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비난받음의 당위성을 자초(自招)하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껏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일을 함에 대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관련 공동체들의 생각의 판단에 따른 용납의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 사회에서도 고래로부터 중용을 말하기도 한 이유도 그러한 것이고 서양에서도 중용적인 덕을 말하는 가운데서 극단적 회의주의적인 개념에서도 벗어나며 삶을 위한 지혜로서의 지식들을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상식이라고 함의 판단을 실제적으로 비로소 받지 않는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성도들의 믿음의 교제라고 함에 적신호를 생각하며 식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사모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것과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으신 것과 같이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하심임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하나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함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과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열방이 열방을 다스리시기 위해 일어나시는 이이신 그에게 소망을 두게 될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며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서로 받으심이라고 함의 당위성이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식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중용적 판단으로만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없음에 난감하지만 믿음 안에서 같은 실제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소망이 넘치게 하실 것에 대한 사실을 기뻐하며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로마에 있는 교회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로서 구성되어진 가운데 율법의 문제 즉 신앙윤리적 행함과 그 믿음의 상관성에 대한 구분적 생각에 따른 그들의 삶에 있어서 분란이 있었고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도저히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판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하심으로 그러한 것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심을 증거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른 것으로서의 섭리라고 함에 있어서 그 자존적 절대 확실성을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로마서 14장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서 협력할 때에 형제에 대한 존재가 하나님이 받으신 존재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가운데서 서로 받으라고 하심에 대한 적극적인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정당함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의 합목적적인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서로 받으라고 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죄악과 비방이라고 함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과 같이 그러한 가운데서의 뜻하심이 소망을 주님 예수께 두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이 그 죄인을 사랑하셨다고 하면 우리 성도들도 그를 사랑할 이유와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사랑하시고 용납하심을 나타내시는 주의 판단하심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나의 기분과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으로 비교판단 정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예수께서 받으시고 사랑하신다면 그 선하신 판단 하에서 나도 받고 사랑함에 나의 판단을 넘어서 너무나 합당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외국에 원정을 가는 그러한 노력들 즉 다메섹으로 가는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래참으심과 자신을 받으시며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하심을 알아서 고린도 교회에게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고전 13:4~7)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서 많이 이야기 하였고 오늘 본문의 문맥으로서의 로마서에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즉 율법의 본성인 행위를 요구함에 있어서 그 윤리적 완성이라고 함이 오래참음이라고 함과 온유함과 같은 것이 본체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형제를 주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받으신 바된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을 주님이 받으신 자들이라는 그 당위성을 합당히 여겨서 받으라고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너희도 받으라’고 하실 때에 그 언어는 ‘프로스람바노세데’입니다, ‘프로스람바노’(proslambavnw)라는 말로써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말로도 사용됩니다만 그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그 앞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하심을 읽는다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는 것으로 표현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 2절에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 세운다는 말은 건축물 건축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사실 집이라는 개념의 ‘오이스’라는 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이 협력하여서 각 부분에서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전을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그 특성적인 것을 받고 그러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망없는 칭찬이 될 것을 사도 바울을 마음에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것에서 형제들을 기둥처럼 쓰이도록 인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으며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성경의 안위를 생각할 때에 비교되어지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빌라델피아교회의 모습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빌라델피아라는 뜻이 형제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나타나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됩니다.(계 3:12) 즉 서로 사랑함으로 인내와 온유함으로써 받음으로 시험의 때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며.. 라는 말씀을 어떤 당위성만을 생각해서 행한다면, 자신의 한계가 이르렀을 때에는 그래도 그렇지.. 라는 입장에서 그 자리에서 벗어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도의적 개념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며 받으셨다고 함을 받을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그 정당함이 있다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록 나의 상대적 판단의 거부적 당위성이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나의 받을 바가 아닌 것으로 알고 주님이 사랑하심으로 내가 사랑함의 합당함을 깨달아 사랑할 수 있도록 오래참고 온유하며 그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서로 받음이라고 하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사랑으로써의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주신 축복과 같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의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그 사랑하심을 따라 사랑할 수 있는 당위성을 기쁘게 따르는 가운데 형제들을 서로 받는 가운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세우며 이루어가는 자들로서 주께로부터 칭찬이 있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5:1-13
너희도 서로 받으라
Accept one another
상식적으로 본다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지나치지 않고 정도껏 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비난받음의 당위성을 자초(自招)하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껏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일을 함에 대하여서 판단할 수 있는 관련 공동체들의 생각의 판단에 따른 용납의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 사회에서도 고래로부터 중용을 말하기도 한 이유도 그러한 것이고 서양에서도 중용적인 덕을 말하는 가운데서 극단적 회의주의적인 개념에서도 벗어나며 삶을 위한 지혜로서의 지식들을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상식이라고 함의 판단을 실제적으로 비로소 받지 않는 믿음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성도들의 믿음의 교제라고 함에 적신호를 생각하며 식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사모하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것과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으신 것과 같이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하심임을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하나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함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과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열방이 열방을 다스리시기 위해 일어나시는 이이신 그에게 소망을 두게 될 것임을 기억하도록 하며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서로 받으심이라고 함의 당위성이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식의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중용적 판단으로만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없음에 난감하지만 믿음 안에서 같은 실제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소망이 넘치게 하실 것에 대한 사실을 기뻐하며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로마에 있는 교회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로서 구성되어진 가운데 율법의 문제 즉 신앙윤리적 행함과 그 믿음의 상관성에 대한 구분적 생각에 따른 그들의 삶에 있어서 분란이 있었고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도저히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판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하심으로 그러한 것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한 사실을 말씀하심을 증거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른 것으로서의 섭리라고 함에 있어서 그 자존적 절대 확실성을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로마서 14장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서 협력할 때에 형제에 대한 존재가 하나님이 받으신 존재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가운데서 서로 받으라고 하심에 대한 적극적인 말씀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정당함을 또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의 합목적적인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서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서로 받으라고 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죄악과 비방이라고 함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과 같이 그러한 가운데서의 뜻하심이 소망을 주님 예수께 두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님이 그 죄인을 사랑하셨다고 하면 우리 성도들도 그를 사랑할 이유와 당위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사랑하시고 용납하심을 나타내시는 주의 판단하심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나의 기분과 상대적 판단이라고 함으로 비교판단 정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예수께서 받으시고 사랑하신다면 그 선하신 판단 하에서 나도 받고 사랑함에 나의 판단을 넘어서 너무나 합당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외국에 원정을 가는 그러한 노력들 즉 다메섹으로 가는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래참으심과 자신을 받으시며 여전히 사랑하시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하심을 알아서 고린도 교회에게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고전 13:4~7)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랑에 대하여서 많이 이야기 하였고 오늘 본문의 문맥으로서의 로마서에서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함을 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즉 율법의 본성인 행위를 요구함에 있어서 그 윤리적 완성이라고 함이 오래참음이라고 함과 온유함과 같은 것이 본체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형제를 주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받으신 바된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을 주님이 받으신 자들이라는 그 당위성을 합당히 여겨서 받으라고 말씀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너희도 받으라’고 하실 때에 그 언어는 ‘프로스람바노세데’입니다, ‘프로스람바노’(proslambavnw)라는 말로써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말로도 사용됩니다만 그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그 앞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하심을 읽는다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친구로 삼다, 옆으로 인도하기 위해 손을 잡다, 집으로 영접하다는 것으로 표현함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 2절에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 세운다는 말은 건축물 건축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사실 집이라는 개념의 ‘오이스’라는 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이 협력하여서 각 부분에서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전을 이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그 특성적인 것을 받고 그러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망없는 칭찬이 될 것을 사도 바울을 마음에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는 것에서 형제들을 기둥처럼 쓰이도록 인도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으며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성경의 안위를 생각할 때에 비교되어지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빌라델피아교회의 모습에서 보는 것과 같이 빌라델피아라는 뜻이 형제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나타나는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됩니다.(계 3:12) 즉 서로 사랑함으로 인내와 온유함으로써 받음으로 시험의 때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며.. 라는 말씀을 어떤 당위성만을 생각해서 행한다면, 자신의 한계가 이르렀을 때에는 그래도 그렇지.. 라는 입장에서 그 자리에서 벗어남을 임의적으로 말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도의적 개념에서 생각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며 받으셨다고 함을 받을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이 사랑하신다는 그 정당함이 있다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록 나의 상대적 판단의 거부적 당위성이 강요되어진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나의 받을 바가 아닌 것으로 알고 주님이 사랑하심으로 내가 사랑함의 합당함을 깨달아 사랑할 수 있도록 오래참고 온유하며 그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서로 받음이라고 하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형제사랑으로써의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주신 축복과 같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의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그 사랑하심을 따라 사랑할 수 있는 당위성을 기쁘게 따르는 가운데 형제들을 서로 받는 가운데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세우며 이루어가는 자들로서 주께로부터 칭찬이 있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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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