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3월 31, 2005

선으로 악을 이기라

2005년 3월 30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2:1-21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善)과 악(惡), 이 주제에 대하여서는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히 많이 논의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식상해지는 가운데서 외면되어지는 경우로 봉착되어지면서도 그 사회에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어질 때마다 다시 거론되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도덕 자체가 사람들의 필요성에 따른 인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성에 따라서 도덕적인 측면에서 비로소 언급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써의 스스로 그 계시적 실존의 정당함을 취하게 되어지는 말씀으로서 말씀하심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물론 도덕이라고 함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형태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함과 인간을 창조하신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때에 그 도덕도 언급하게 되어지지만 먼저 자증(自證, Autopistia)의 계시로서의 말씀인 성경에서, 특히 본문의 말씀에서 증거하시는 그 선과 악이라고 함을 주목하며 그것의 말씀하심에 대한 증거와 순종함의 기쁨과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들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 즉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심으로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분량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4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선 개인적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을 말함에 그 달란트적인 것을 나열함에 비하여서, 마음에 두어야 할 중심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심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을 비롯해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심과 같은 것, 결론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령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되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재창조적 섭리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축복의 말씀하심을 받음에 있어서 분별하여야 함의 지혜로써 선과 악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이라고 함은 마땅히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심과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말라고 하심을 지적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하심에 관련되어진 것을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것에 결론적인 측면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여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음을 또한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문맥에서 읽게 되어지는 선과 악함 중에서 먼저 악함, 마땅히 그 이상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이라고 함이 무엇인지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교회에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의 율법과 믿음에 따른 신앙윤리의 문제라고 함에서 식상하며 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함이라고 하는 것과 그 이상의 품지 말아야 할 생각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지 말라고 하심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서 믿음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의적인 임의적인 지혜의 형상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함이라고 함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인하여서 협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함이라고 함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협력하게 하심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함에 이르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선함이라고 함의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하심을 스스로 취하심이라는 절대 성실하심에서 주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의롭다 칭하심을 받은 성도들과 그들이 믿음 안에서 분별하는 것에 재가를 주시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믿음의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사실이 되어지며 그것이 상대적인 현실적인 실제의 삶 속에서 도덕적인 선함의 형식을 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언급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의(義)로 여기심(창 15:6)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의 사실을 믿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 부정으로 표현하게 되어지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매여 있을 수 없으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자신이심을 나타내심인데 이를 믿는 성도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의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주 안에서 선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실’이라고 함의 실제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善)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른 예정하심의 신실하심과 그 절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되어질 수 없음을 기억하고 그 믿음 안에서, 어쩌면 죽음의 공회와 같이 협력의 사실을 말할 수없어 보이는 듯한 자리에서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인내하며 주의 뜻하심을 상대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내는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선(善)이고 악(惡)인가 할 때에 도덕적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실리적 유익이라는 개념에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선과 악이라고 함의 사실이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어지고 분별되어진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할 때에 신앙의 윤리 인생의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향방이 없는 생각과 판단으로 식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게으른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를 받고 실행하지 않은 악한 종의 모습으로써의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자존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로서의 선(善)이며, 마땅히 품어야할 이상의 생각과 같은 것에서 벗어남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선(善)이며 이와 같이 선(善)과 악(惡)을 구별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영적 예배로 경배드림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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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