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2:16-23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judges
그렇게 오래 되어진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는 목양적인 개념에서 또는 주의 성도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함에 있어서 관계성에 대한 노력을 하여왔습니다. 그러한 것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멘토’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멘토’라는 말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쿠스의 보호자요 가정교사였던 ‘멘토(Mentor)’에게서 유래되어졌는데 그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아들을 아버지 못지않는 훌륭한 인물로 키워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정교사와 같은 존재를 성경의 인물관계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보다도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은 사사들(judges)이라고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 이면서도 오히려 철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는 유명한 스승에게서 배운다는 측면에서 ‘사사(師事)’(making a person one’s teacher; become a person’s pupil)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 두 ‘멘토’와 ‘사사’라는 말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사의 의미와 실제로 받음이 좋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로 인함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신 가운데서 그 사사와 함께 하셨음과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으로 구원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 이스라엘들이 부르짖음에 대한 이유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더욱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음과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청종치 않음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남겨두셨음에 대한 것을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으로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예표적 실제로서 그 당시의 실제적인 존재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주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고 그 가운데서 그들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여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전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 이방인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으로 주셨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올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아예 두지 않으셨음이 좋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으로서의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는 형식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의 모습임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선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아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것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삶의 모습에서 주의 형상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 보편적인 타당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심에 의문의 당위성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기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인 판단으로써의 삶의 모습을 지도하는 사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지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서 이의라는 것이 제기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여지가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서 사사가 없을 때에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행하고 사사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서 생활한다는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합당하게 세우셨다는 것과 그것의 합목적적인 것이 하나님께 경배함의 진정한 사실과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목적적인 신앙의 모습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교제와 그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한 관계라는 것을 그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관계로 생각함에는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관계성이라는 것에서 행하는 가운데서 멘토라든지 아니면 사사와 같은 관계성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성장하도록 행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최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멘토라는 개념은 이방의 개념으로써 취할 수 있으면서도 주의하여야 할 것은 대인관계라는 개념과 그 대인관계에서의 도의적 정적인 인상을 받도록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의도하는 합목적적인 교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는 개념입니다.
물론 임의적으로 불어넣을 수 있지만 그 교제에서의 멘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중보적 역할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주님에 대한 것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경우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측면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우상적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는 그 우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오히려 학습적인 것으로 유용하다는 것으로 받는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에서의 사사라는 개념은 역시 지식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학문이나 지성적인 것을 기준으로 더 나아가서 그의 가르치는 자의 인격의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데 역시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에 기독교적인 측면에서의 사사를 말할 수 있지만 본래 학문의 기본적인 입장으로써의 철학을 말한다면 그러한 전제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는 수련을 말하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사들(judges)에 대한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 존재와 사역적인 정당함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전제를 하는 것은 그만큼의 한정적 의미로써 보편을 말하지 못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의 보편적인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사사적 역할을 하는 그 종들의 입장을 속히 떠나며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삶과 학문에 대하여서 떠나는 모습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자체 즉(‘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모순적인 입장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전제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는 것이 좀더 솔직한 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전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읽게 되어질 때에는 가장 보편적인 것을 전제하여야함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보편이 전제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생각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핑계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사들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의 그 축복에 섰지만 그 사사들이 죽음이 있게 되어지면 그 때를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 이방인들과의 언약의 실제를 전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그들의 삶의 평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반 처세술적인 개념에서는 이러한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무 이상이 없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유익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 중에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서 답변할 수 없다는 개념에서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개념으로 일관하거나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대충 상식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최선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고 유일신을 믿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다른 종교도 포용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현상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모두 넘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주 하나님 앞에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민족적인 영웅 신앙의 영웅적 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서 그리고 그 소명의 정도를 따라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향성에서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사사로서의 모습과 사역적 정당함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그 증거는 오히려 독이 되어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이 옳은데로 행하는 악한 쓴 뿌리를 낳게 되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 안에서 분별하여 받는다고 할 때에 멘토의 입장은 주 하나님 안에서 그 관계의 설정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가운데서든 인간관계라는 개념의 실리적 개념과 태두리가 그를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사사라는 개념은 주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이라고 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다를 건너 자신보다도 더 악한 독사의 자식들을 길러내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이방종교도 포용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사사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함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점에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멘토나 사사라는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이라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그 분별되어진 가운데서 실제적인 섬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개념을 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현 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때에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지난날 사사들을 통하여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서 그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가운데서의 섬김을 통하여서 이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그 때를 말하는 이사야와 같이 이시대의 주의 사사들로써 쓰임을 받게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삿2:16-23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judges
그렇게 오래 되어진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는 목양적인 개념에서 또는 주의 성도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함에 있어서 관계성에 대한 노력을 하여왔습니다. 그러한 것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멘토’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멘토’라는 말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쿠스의 보호자요 가정교사였던 ‘멘토(Mentor)’에게서 유래되어졌는데 그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아들을 아버지 못지않는 훌륭한 인물로 키워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정교사와 같은 존재를 성경의 인물관계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보다도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은 사사들(judges)이라고 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 이면서도 오히려 철학이나 다른 학문에서는 유명한 스승에게서 배운다는 측면에서 ‘사사(師事)’(making a person one’s teacher; become a person’s pupil)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 두 ‘멘토’와 ‘사사’라는 말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어지는 가운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사의 의미와 실제로 받음이 좋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증거로 인함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신 가운데서 그 사사와 함께 하셨음과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으로 구원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 이스라엘들이 부르짖음에 대한 이유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더욱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음과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청종치 않음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남겨두셨음에 대한 것을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으로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예표적 실제로서 그 당시의 실제적인 존재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주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고 그 가운데서 그들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여 이방인들과 언약을 맺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전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 이방인들을 다 쫓아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것으로 주셨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올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아예 두지 않으셨음이 좋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적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으로서의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는 형식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의 모습임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선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아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것도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삶의 모습에서 주의 형상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선하심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 보편적인 타당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심에 의문의 당위성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기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함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인 판단으로써의 삶의 모습을 지도하는 사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지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서 이의라는 것이 제기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여지가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서 사사가 없을 때에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행하고 사사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서 생활한다는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는 것,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합당하게 세우셨다는 것과 그것의 합목적적인 것이 하나님께 경배함의 진정한 사실과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합목적적인 신앙의 모습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교제와 그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한 관계라는 것을 그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관계로 생각함에는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관계성이라는 것에서 행하는 가운데서 멘토라든지 아니면 사사와 같은 관계성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성장하도록 행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에 대하여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최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멘토라는 개념은 이방의 개념으로써 취할 수 있으면서도 주의하여야 할 것은 대인관계라는 개념과 그 대인관계에서의 도의적 정적인 인상을 받도록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의도하는 합목적적인 교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는 개념입니다.
물론 임의적으로 불어넣을 수 있지만 그 교제에서의 멘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중보적 역할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가운데서 주님에 대한 것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경우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측면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우상적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는 그 우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오히려 학습적인 것으로 유용하다는 것으로 받는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에서의 사사라는 개념은 역시 지식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학문이나 지성적인 것을 기준으로 더 나아가서 그의 가르치는 자의 인격의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데 역시 여기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과 그 구별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제되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경우에 기독교적인 측면에서의 사사를 말할 수 있지만 본래 학문의 기본적인 입장으로써의 철학을 말한다면 그러한 전제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지 않는 수련을 말하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사들(judges)에 대한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 존재와 사역적인 정당함을 전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전제를 하는 것은 그만큼의 한정적 의미로써 보편을 말하지 못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의 보편적인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사사적 역할을 하는 그 종들의 입장을 속히 떠나며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삶과 학문에 대하여서 떠나는 모습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자체 즉(‘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는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모순적인 입장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전제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는 것이 좀더 솔직한 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전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읽게 되어질 때에는 가장 보편적인 것을 전제하여야함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보편이 전제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생각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핑계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사들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의 그 축복에 섰지만 그 사사들이 죽음이 있게 되어지면 그 때를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 이방인들과의 언약의 실제를 전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그들의 삶의 평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반 처세술적인 개념에서는 이러한 앞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무 이상이 없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유익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 중에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서 답변할 수 없다는 개념에서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개념으로 일관하거나 또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대충 상식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최선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고 유일신을 믿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다른 종교도 포용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고 함을 현상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모두 넘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이러한 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주 하나님 앞에서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민족적인 영웅 신앙의 영웅적 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서 그리고 그 소명의 정도를 따라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방향성에서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다면 그 사사로서의 모습과 사역적 정당함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그 증거는 오히려 독이 되어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이 옳은데로 행하는 악한 쓴 뿌리를 낳게 되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 안에서 분별하여 받는다고 할 때에 멘토의 입장은 주 하나님 안에서 그 관계의 설정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가운데서든 인간관계라는 개념의 실리적 개념과 태두리가 그를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사사라는 개념은 주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이라고 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다를 건너 자신보다도 더 악한 독사의 자식들을 길러내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이방종교도 포용하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과연 하나님 앞에서 사사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찾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함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점에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멘토나 사사라는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이라는 것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그 분별되어진 가운데서 실제적인 섬김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개념을 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현 시대에 있어서는 참으로 가슴을 치게 되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을 때에 진정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는 가운데서 지난날 사사들을 통하여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서 그 세우신 질서를 따르는 가운데서의 섬김을 통하여서 이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그 때를 말하는 이사야와 같이 이시대의 주의 사사들로써 쓰임을 받게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시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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