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9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0:1-21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not in..
한 때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인해서 소비자측과 보험회사측 그리고 해당 회사들 간에 분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리콜제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가운데서의 조치와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요즘에는 그러한 논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쩜 엔진의 결함이냐 변속기의 결함이냐 소비자측의 부주의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한 언급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형태적인 측면만 고려해볼 때에 일반적으로 고급차량들이 사고난 것을 볼 때에 차가 잘 나가게 된다는 그러한 예민함을 말하기 전에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과 대처요령이라고 함이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에 비교하여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떤 일이나 행함에 있어서, 그 열심을 말하게 될 때에 분별없이 단정적으로 정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 열심이라고 함의 정체성이 재고되어져야함이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인 것과 같이 그 충성이라는 말은 열심이라는 요소적 개념에서 정체성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열심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열심에 대한 묘사를 바다를 지나는 것에 비교하시고 있습니다.(마 23:15)
그래서 그러한 열심이라는 것의 현상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실제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기에는 상당히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앞서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이 사실임을 말하게 될 때에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현상적 개념에서 비로소 이해하기 보다는 주의 복음의 말씀에서 사실 규정을 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에게 중요성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부딪혀 넘어짐에 대한 것을 로마서 9장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원하고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고 함을 말하며 저희의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함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함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는 불복종을 하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서 율법의 마침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더 나아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2절에 언급되어진 말씀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러나 다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주의 말씀은 온 땅에 증거가 되어짐에 대한 언급과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에게 주의 손이 펴졌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잘못된 열심이라는 정체성은 성도들의 연합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아드라뭇데노’(행 27:2)와 같이 죽음의 공회와 같이 파선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으며 참으로 바리새인들의 열심이라고 함과 구별되어지면서도 지식에 따른, 합당한 신앙윤리의 힘의 정체성으로써의, 하나님의 열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필요에 따라서 구비되어지는 것이나 판단되어지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을뿐 전반적인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분복으로 주시는 지식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와 구분되어진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역시 스스로 존재하시고 자신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경험에 따라서 또는 시간적 개념의 차이나 여타 그러한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존재와 지식이 아니고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존재가 그로부터의 정당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동연적으로 우리의 몸의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는 달리 죄를 지은 이후의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사람들은 죄로 그 인식의 변화가 왜곡되어지는 가운데서 존재와 지식이라고 함의 구분적 실체와 또한 존재를 위한 필요충분으로써의 지식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어떤 설(說)이라는 하나의 개연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참된 보편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겸손이라는 사실을 받기 주저하는 가운데서 서로의 공방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수록 죽음의 공회적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어지며 믿음의 선한 싸움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에 있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직도 주님 안에서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그러한 옥에서 나오도록 함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감옥의 문을 열게 되어지는 것은 행함이라는 신앙윤리라고 함에 대하여서 그 열쇠가 바로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윤리라고 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적인 것은 하나님께 인도하게 되어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미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되어진 자는 자존의 하나님 안에 있게 되어지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에서 이미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의 실제라는 것이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과 타당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성도들이 함께 되어진 자들로써 행함의 상대적 완전성과 그것을 지나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판단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 마침이 되어짐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의 실제를 율법의 완성적 개념의 여지를 놓고 다투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다 이루지 못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있다고 생각하여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올라오셔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에게 그 모습이 되어짐을 자각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어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의 신실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행함이라고 함의 당위성으로 묶으려는 사단의 결박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유하시며 하시게 하셨고, 특히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스스로 주장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고 할 때에 그가 말씀하심은 상대적인 형태를 통하여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그것의 형태적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말씀이심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연합에 대하여서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사실을 믿고 행할 수 있어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 그 의의 사실을 받게 되는데 이르며 그러한 존재적인 고백과 입술의 고백으로 주님을 시인하게 되어지는 전인격적인 신앙고백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른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형태적인 측면의 비판적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협력의 사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살아가는 것의 열매를 주께로 인증받게되어짐을 믿고 행하는 그 열심이 바리새인의 의에 따른 지식 없는 열심이 아니라 참된 열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그것의 형태적 불완전함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참된 실존을 말하며 참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보편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체적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 성도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와 같이 있게 되어지며 부단히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당위성도 참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형태적인 정황에서 요구되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하는 실증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고 할 때에는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에 이르는 그러한 바리새적인 경향의 바다를 지나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에 받아 형태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재가가 있으면 참된 섬김과 참된 열정으로써의 열심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0:1-21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they have a zeal for God, but not in..
한 때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인해서 소비자측과 보험회사측 그리고 해당 회사들 간에 분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리콜제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가운데서의 조치와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요즘에는 그러한 논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쩜 엔진의 결함이냐 변속기의 결함이냐 소비자측의 부주의냐 그렇지 않으냐 그러한 언급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형태적인 측면만 고려해볼 때에 일반적으로 고급차량들이 사고난 것을 볼 때에 차가 잘 나가게 된다는 그러한 예민함을 말하기 전에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그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과 대처요령이라고 함이 요구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에 비교하여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떤 일이나 행함에 있어서, 그 열심을 말하게 될 때에 분별없이 단정적으로 정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그 열심이라고 함의 정체성이 재고되어져야함이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인 것과 같이 그 충성이라는 말은 열심이라는 요소적 개념에서 정체성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열심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의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열심에 대한 묘사를 바다를 지나는 것에 비교하시고 있습니다.(마 23:15)
그래서 그러한 열심이라는 것의 현상적 개념에서의 비로소 실제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기에는 상당히 모호한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앞서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이 사실임을 말하게 될 때에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현상적 개념에서 비로소 이해하기 보다는 주의 복음의 말씀에서 사실 규정을 하여야 할 것이며 이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에게 중요성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부딪혀 넘어짐에 대한 것을 로마서 9장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원하고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고 함을 말하며 저희의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함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함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는 불복종을 하였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어서 율법의 마침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더 나아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을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2절에 언급되어진 말씀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러나 다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함을 지적하면서 주의 말씀은 온 땅에 증거가 되어짐에 대한 언급과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에게 주의 손이 펴졌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잘못된 열심이라는 정체성은 성도들의 연합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아드라뭇데노’(행 27:2)와 같이 죽음의 공회와 같이 파선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으며 참으로 바리새인들의 열심이라고 함과 구별되어지면서도 지식에 따른, 합당한 신앙윤리의 힘의 정체성으로써의, 하나님의 열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필요에 따라서 구비되어지는 것이나 판단되어지는 것으로서 가치가 있을뿐 전반적인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분복으로 주시는 지식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와 구분되어진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역시 스스로 존재하시고 자신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경험에 따라서 또는 시간적 개념의 차이나 여타 그러한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존재와 지식이 아니고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존재가 그로부터의 정당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동연적으로 우리의 몸의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는 달리 죄를 지은 이후의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사람들은 죄로 그 인식의 변화가 왜곡되어지는 가운데서 존재와 지식이라고 함의 구분적 실체와 또한 존재를 위한 필요충분으로써의 지식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어떤 설(說)이라는 하나의 개연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는 참된 보편적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서 어떤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겸손이라는 사실을 받기 주저하는 가운데서 서로의 공방이라고 하는 것이 그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수록 죽음의 공회적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어지며 믿음의 선한 싸움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에 있는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직도 주님 안에서 온전한 정체성을 가진 자로서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그러한 옥에서 나오도록 함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감옥의 문을 열게 되어지는 것은 행함이라는 신앙윤리라고 함에 대하여서 그 열쇠가 바로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윤리라고 함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 본래적인 것은 하나님께 인도하게 되어지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미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되어진 자는 자존의 하나님 안에 있게 되어지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하는 것의 합목적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에서 이미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의 실제라는 것이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라는 것과 타당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성도들이 함께 되어진 자들로써 행함의 상대적 완전성과 그것을 지나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판단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 마침이 되어짐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움의 실제를 율법의 완성적 개념의 여지를 놓고 다투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다 이루지 못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있다고 생각하여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다 이루지 못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올라오셔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에게 그 모습이 되어짐을 자각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어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의 신실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행함이라고 함의 당위성으로 묶으려는 사단의 결박이라고 하는 것에서 자유하시며 하시게 하셨고, 특히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스스로 주장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고 할 때에 그가 말씀하심은 상대적인 형태를 통하여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그것의 형태적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말씀이심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연합에 대하여서 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사실을 믿고 행할 수 있어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 그 의의 사실을 받게 되는데 이르며 그러한 존재적인 고백과 입술의 고백으로 주님을 시인하게 되어지는 전인격적인 신앙고백이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따른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형태적인 측면의 비판적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협력의 사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살아가는 것의 열매를 주께로 인증받게되어짐을 믿고 행하는 그 열심이 바리새인의 의에 따른 지식 없는 열심이 아니라 참된 열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그것의 형태적 불완전함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참된 실존을 말하며 참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보편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체적 절대의 보편적 재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 성도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와 같이 있게 되어지며 부단히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당위성도 참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은 형태적인 정황에서 요구되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하는 실증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고 할 때에는 상대적인 완성을 지나 절대의 영역에 이르는 그러한 바리새적인 경향의 바다를 지나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에 받아 형태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재가가 있으면 참된 섬김과 참된 열정으로써의 열심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분별력이 있게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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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