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28, 2005

착한 행실을 보고

2005년 2월 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5:1-16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본적인 입장에서 콤플렉스(complex)를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종종 집착을 불러오기도 하고 또한 그로 인하여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경향도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착하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러한 의미의 경향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비평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인정하고 있는 본문이 주님의 산상설교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도덕철학적인 선한 노력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 달리 도덕적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주님의 언급하심으로써 ‘착한 행실’을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그 말씀하시는 자에 대한 인식과 의도라고 함을 분명하게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 그들의 동의와는 다르게 그러면서도 신앙의 윤리적 합당한 모습과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심에 제자들이 나아옴과 산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팔복(八福)에 대한 언급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의 복을 말씀하시면서 받을 상이 큼과 전에 선지자들이 이렇게 핍박받았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세상에 소금과 빛을 말씀하시면서 그 맛을 잃으면 버리울 것과 다만 밟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모여든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둠을 말씀하시면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소위 주님의 산상설교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시험받으심 다음에 나타나는 것으로써 그 상관성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 근거를 마음에 두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과 5장의 말씀의 문맥을 주목해보면,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마음에 두어야 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종노릇하는 자들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도 그러한 자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 떡과 그 존재를 위한 뛰어내림과 자신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단의 시험이 있었고 주님이 메시아이심과 그 사역의 정당함을 부인하여 그 사역을 결박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오히려 사단을 결박하셨던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하심이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시비를 하는 월권적 행동이 제한되어짐을 실제적으로 말씀하심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단의 결박되어진 가운데, 사단은 주의 종 엘리야로 온 세례요한을 결박함으로써 그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의 행보라고 하는 것을 결박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산돌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사단의 성도들의 예표적 실제 증인인 세례요한을 결박한 것이 성도들을 결박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굴러다니는 ‘돌들과 같은 자들이 소리지르게 될 것’(눅 19:40, 참고)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으로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와 그 형제들을 제자들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제자들을 통하여서 무리를 이루게 되어질 것과 그들의 주의 제자들로서의 보내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며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한 동네 주의 몸된 교회가 가리워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마 5: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

사도 바울이 이처럼 증거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 부름의 상이라고 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 산상설교에서 팔복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핍박이라고 함과 같이 주님을 결박하려고 노력하였던 사단이 자신이 결박되어짐을 알고 해변가 모레와 같은 성도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의 아들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 처소를 예비하시며 양육하게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례요한이 개인적으로 사단의 결박이라고 할 수 있는 잡힘과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의 증거의 실패가 아니라 완성을 말씀하시며 그가 결박되어진 것이 아니라 결박당하는 것과 같은 ‘핍박의 사람으로서 선지자로 주목되어지는 것’(마 11:7~11)과 같이 천국의 상이 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예정되어진 가운데 인물인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 세례 요한과 같이 비록 결박당하는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재가가 있게 있는 예정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산위의 동네’라는 주님 앞에 나온 제자들의 한정되어진 무리들을 가르키시며 그들을 가리울 자들 결박할 자들이 없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의 현실적인 사실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 세상의 빛이라고 규정하신 하나님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 존재에 대한 분명한 실제사실을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생존 세계에서, 존재에 대한 위협 속에서, 착한 행실을 한다는 것의 콤플렉스(complex)를 통해 자신의 존재적 당위성을 찾는 것은, 그 사실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위 '도덕철학적 입장'은 그 콤플렉스(complex)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당위성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적 당위성이 칭찬을 받게 되어지는 것에 비로소 의미를 두는 것이 마치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써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버려진 소금과 같이 그 존재의 가치와 그 달란트를 행하지 않는 자의 모습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연적인 도덕적 선함을 말함에 대해 산위의 동네와 같이 한정되어지는, 사단의 결박처럼 잘못된 인식과 비판으로써의 성도들의 모습이 인식강요되어질 수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어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작은 노력의 순종을 할 수 있는 합당한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심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콤플렉스(complex)와는 달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생존세계에서의 존재시비라고 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규정되어진 것이라고 할 때에 참된 실제로서의 착함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의 예수께서 구주이심에 대한 증거와 그에 따른 그 보편적인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현실규정과 그 질서에 따른 판단과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그에 따른 선하심을 삶에 나타내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해석되어지고 사실이 되어진 도덕적 개념을 말씀하심임을 받아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산위의 동네를 숨기우지 못하게 하심의 은혜를 받아 세상에 주의 구원의 빛을 비추는,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로서 하나님의 받으심이 있으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