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1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4:1-11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삶의 어려움을 느낄 때에 누군가 힘이 되어주며 삶의 희망이라고 함을 용기라고 함을 주며 삶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동요하는 그러한 노력이 참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광고들 속에서도 그러한 태마의 선전 문구들이나 주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어떤 그러한 주제를 통한 노력들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는데 필요라기보다는 즉 합목적적인 인위성의 판단에서 벗어나서 예언적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신앙의 경건한 삶을 위한 그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에 있어서 많은 신관(神觀)들 그리고 범신적 개념의 신앙들을 모두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할 당위성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 신관(神觀)이라고 함이 이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임의성을 벗어나지 못한 실체들로서 부인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적 자체적 정당함을 지닌 자로서의 참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심에 대한 것으로 증거하심의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삼위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증거가 있고 난 다음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사단에게 시험받으심과 그 내용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심으로 주리신 가운데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표를 보이라는 것으로써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첫 번째 시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께 같은 증표를 요구하며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것을 시험하는 자가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시험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님에 대한 말씀하심과,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 것과 물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심으로 답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시험받으신 이유와 목적이라고 함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의 계시로써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인 권세를 얻게 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식이 먼저이냐 존재가 먼저인가 그러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존재가 있는 가운데서 인식을 말하게 되어지는가 아니면 인식이라고 함이 시작할 때에 존재에 대한 의식이 기본적인가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동연적(coterminous)으로 즉 같이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 현상적 의미에서 현대의 생각들은 생각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인 개념에서 사람의 존재와 인식에 대하여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도 존재에 대한 시비라고 함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에 대한 그 존재라고 함도 배고픔이란 것으로 한정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죄인된 인생의 모습이 자기 기만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판단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체적 부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리신 것은 ‘모세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게 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예언하였던 것’(신 18:15; 행 7:37)과 같이 그러한 모세의 사십 주야로 산이 있어 말씀을 받았던 것과 같은 모습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에 따른 그 예언되어진 분으로서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기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가 산에서 시험받았는가 하는 것과 시내산과 광야의 유비적 동일성을 말할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증거의 실체가 이미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말하기 위한 성례전적인 개념의 구체적 사실이라고 함과 동일한 장소의 유비라는 개념의 의미를 재고(再考)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이 요구되었다면 좀더 이미 모세의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의 시험으로써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시비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그 차이점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전 꼭대기라고 하는 신앙적인 모습의 정체성에 대한 전제적 비난으로써 신앙의 절정적인 입장에서 존재가 부인되어진다고 할 때를 말하기 위해서 그 장소를 택하여 뛰어내리라는 것과 그것이 신앙의 정체성의 사실을 말한다는 말씀하심에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으로써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이 되신 즉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합리성 자체로써, 자체적 정당함이 없이, 판단함의 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음에 대하여서 변론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시험하는 자는 다시 그 말씀하심의 장소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에 대한 것을 소유한 것과 같이 기만하여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전 5:18,19)을 임의적으로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기만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과 같이 기만된 모습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함을 자신이 규정하는 권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그의 월권적 모습과 정체성에 대한 한정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에 대한 주재(主宰)권을 말하는 것과 같이 그러한 것에서 물러나라 즉 그 권세라고 함이 한정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심에서는 이미 그의 반론적인 시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국한되어질 것이라고 함과 그 존재가 결박되었음을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정통성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존재규정에 따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신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만왕의 왕으로서 오신 분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는 현상적인 실제적 판단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에 섬김의 사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시험당하신 것은 피동적 개념의 모습에서 말씀하시면서도 실상은 주권적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시며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시험을 당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자신의 신실하심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실제적 강요에서도 벗어나 진정으로 주 앞에서 경배하게 하심의 은혜를 성도들이 입게 하신다는 것을 사실화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께서는 기도하심에서 말씀하셨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험받으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땅에서 이루실 것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인하여서 땅에서 주의 뜻하심에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들의 믿음의 노력에 따른 결박을 풀어버림에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자녀가 되며, 복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핍박함이 있게 되어질 것인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믿어도 나사로와 같이 생활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욥과 같이 재산과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육신의 고통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신앙인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 합당한 것인가?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비로 인하여서 신앙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부정을 요구하는 때가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그 욥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의 결박을 풀고자 하는 그 순전한 노력에 주의 은혜로 재가를 받게 하셔서 그 정당함으로 주 앞에서 합당한 존재로서 증거되어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의 시험받으심에서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신앙이 밥 먹여주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의 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존재적 시비를 성도들에게 물어올 수 있다는 것이며 끊임없는 집요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 인생으로써 별도리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상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이냐는 식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의 사실과 구원의 사실을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당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라고 하심의 히브리서의 증거의 근거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단이 월권적 노력으로써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것을 통하여서 즉 주의 예정하심을 이루었으니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주의 부활하심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신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에서 놓아주시며 아브라함의 자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붙들어 주시기를 그의 절대 신실하심의 정당함으로 인(印)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은혜로 우리 성도들이 곤고한 삶 속에서 생존세계에서 존재의 시비에 대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주님과 동행하시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가시며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마4:1-11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삶의 어려움을 느낄 때에 누군가 힘이 되어주며 삶의 희망이라고 함을 용기라고 함을 주며 삶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동요하는 그러한 노력이 참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이겨나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광고들 속에서도 그러한 태마의 선전 문구들이나 주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어떤 그러한 주제를 통한 노력들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는데 필요라기보다는 즉 합목적적인 인위성의 판단에서 벗어나서 예언적 측면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데 신앙의 경건한 삶을 위한 그 증거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에 있어서 많은 신관(神觀)들 그리고 범신적 개념의 신앙들을 모두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할 당위성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 신관(神觀)이라고 함이 이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임의성을 벗어나지 못한 실체들로서 부인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적 자체적 정당함을 지닌 자로서의 참된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심에 대한 것으로 증거하심의 실제를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삼위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증거가 있고 난 다음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 사단에게 시험받으심과 그 내용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심으로 주리신 가운데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표를 보이라는 것으로써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첫 번째 시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께 같은 증표를 요구하며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것을 시험하는 자가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시험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님에 대한 말씀하심과,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 것과 물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심으로 답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시험받으신 이유와 목적이라고 함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의 계시로써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인 권세를 얻게 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식이 먼저이냐 존재가 먼저인가 그러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존재가 있는 가운데서 인식을 말하게 되어지는가 아니면 인식이라고 함이 시작할 때에 존재에 대한 의식이 기본적인가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동연적(coterminous)으로 즉 같이 주셨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존재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가운데서 현상적 의미에서 현대의 생각들은 생각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인 개념에서 사람의 존재와 인식에 대하여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도 존재에 대한 시비라고 함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에 대한 그 존재라고 함도 배고픔이란 것으로 한정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죄인된 인생의 모습이 자기 기만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한 판단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체적 부정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리신 것은 ‘모세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있게 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예언하였던 것’(신 18:15; 행 7:37)과 같이 그러한 모세의 사십 주야로 산이 있어 말씀을 받았던 것과 같은 모습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에 따른 그 예언되어진 분으로서의 자신이심을 나타내시기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모세가 산에서 시험받았는가 하는 것과 시내산과 광야의 유비적 동일성을 말할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증거의 실체가 이미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말하기 위한 성례전적인 개념의 구체적 사실이라고 함과 동일한 장소의 유비라는 개념의 의미를 재고(再考)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이 요구되었다면 좀더 이미 모세의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시험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의 시험으로써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시비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그 차이점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전 꼭대기라고 하는 신앙적인 모습의 정체성에 대한 전제적 비난으로써 신앙의 절정적인 입장에서 존재가 부인되어진다고 할 때를 말하기 위해서 그 장소를 택하여 뛰어내리라는 것과 그것이 신앙의 정체성의 사실을 말한다는 말씀하심에 모순이 되어진다는 것으로써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씀이 하나님이 되신 즉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합리성 자체로써, 자체적 정당함이 없이, 판단함의 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음에 대하여서 변론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시험하는 자는 다시 그 말씀하심의 장소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에 대한 것을 소유한 것과 같이 기만하여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전 5:18,19)을 임의적으로 자신이 주는 것과 같이 기만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과 같이 기만된 모습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함을 자신이 규정하는 권세가 있는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그의 월권적 모습과 정체성에 대한 한정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에 대한 주재(主宰)권을 말하는 것과 같이 그러한 것에서 물러나라 즉 그 권세라고 함이 한정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심에서는 이미 그의 반론적인 시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국한되어질 것이라고 함과 그 존재가 결박되었음을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정통성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존재규정에 따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신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만왕의 왕으로서 오신 분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는 현상적인 실제적 판단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에 섬김의 사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시험당하신 것은 피동적 개념의 모습에서 말씀하시면서도 실상은 주권적 자기 계시를 나타내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시며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실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시험을 당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자신의 신실하심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실제적 강요에서도 벗어나 진정으로 주 앞에서 경배하게 하심의 은혜를 성도들이 입게 하신다는 것을 사실화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의 권세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주님께서는 기도하심에서 말씀하셨는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시험받으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땅에서 이루실 것에 대한 자기 계시가 되어지며 그것을 인하여서 땅에서 주의 뜻하심에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종들의 믿음의 노력에 따른 결박을 풀어버림에 하나님의 재가가 있게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자녀가 되며, 복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핍박함이 있게 되어질 것인데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믿어도 나사로와 같이 생활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욥과 같이 재산과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육신의 고통이라고 하는 가운데서 신앙인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 합당한 것인가?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비로 인하여서 신앙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부정을 요구하는 때가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그 욥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의 결박을 풀고자 하는 그 순전한 노력에 주의 은혜로 재가를 받게 하셔서 그 정당함으로 주 앞에서 합당한 존재로서 증거되어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심을 주의 시험받으심에서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신앙이 밥 먹여주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의 말들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존재적 시비를 성도들에게 물어올 수 있다는 것이며 끊임없는 집요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종노릇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 인생으로써 별도리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상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이냐는 식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의 사실과 구원의 사실을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당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라고 하심의 히브리서의 증거의 근거로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단이 월권적 노력으로써 주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것을 통하여서 즉 주의 예정하심을 이루었으니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주의 부활하심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 절대 정당함을 가지시고 자신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에서 놓아주시며 아브라함의 자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붙들어 주시기를 그의 절대 신실하심의 정당함으로 인(印)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은혜로 우리 성도들이 곤고한 삶 속에서 생존세계에서 존재의 시비에 대한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주님과 동행하시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가시며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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