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6:1-23
종된 자의 자기(自己) 정체성
우리의 삶 속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나 주체적으로 해 나가는 일들에 있어서 그 방법론에 대한 재고를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방법론이 좋다는 개념만으로 취득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기에는 이르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방법론이 좋다고 하여도 그 방법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에 대한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법론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고후 10:5)이 전제되어진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그의 삶의 정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고자 하는 그 합리적인 생각들의 정체성도 옳은 모습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게 하심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종 된 자로서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는 성도들의 종된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음에 대한 언급에서 이어지는 말씀인데, 반문되어질 수 있는 말로써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써 사도 바울은 6장의 증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반문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면서 그러한 것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장사되어진 자의 실제적인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의 상관성에서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유하다는 것과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것과 은혜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은혜아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반문되어질 수 있었던 은혜를 위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좀더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그 받는 자의 종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바가 된 외적인 공통된 신앙고백이라고 함을 전제로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 바가 된 자들로써의 우리 성도들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드려진 자에게 있게 되어지는 열매를 생각하게 하며 언급을 맺고 있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의의 종이 된 자에게 거룩하게 하는 열매를 얻었다고 함을 말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종의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행함의 결과들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공허한 허영의 집’(호 5:8)에서의 깨닫는 자로써 슬픔의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들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기본적인 생각’(고후 10:5)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의의 병기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준비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 가지 주목할 수 있는 기구가 있는데, 그것은 ‘통발’이라는 것입니다. 그 ‘통발’은 “가는 댓조각이나 싸리를 엮어서 통같이 만든 고기잡이 기구. 아가리에 작은 발을 달아 날카로운 끝이 가운데로 몰리게 하여 한번 들어간 물고기는 거슬러 나오지 못하게 하고 뒤쪽 끝은 마음대로 묶고 풀게 되어 있어 안에 든 물고기를 꺼낼 수 있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때에 그 생각이라고 함, 특히 인생의 존재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생각이라고 함을 사로잡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이 없는 합리성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피곤하게 하여서 손들게 하는 그러한 개연적인 포기상태를 이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고라고 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가질 때에 참된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함에서 상대적으로도 복음이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고라는 개념 우리 인생에 대한 존재 이해가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만 규정되어져서 항상 여지를 남겨두는 가운데서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고 그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에게 정죄하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은 한 반론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상대적으로는 은혜를 위한 죄의 가능성과 필요성이라고 함까지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롬 5:20; 롬 6:1)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실제의 상황에서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서 은혜로 전환하게 되어지는 현상을 말하게 되어지며 앞서 언급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실제로서의 삶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사실들이 성도들을 심판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자신이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기름 부어 성별케 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보내시는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의롭다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그 의로움은 상대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 활동하게 되어지는 권세와 사실을 분별하며 사실화 시켜나가는 그리고 그 사실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자의 권세를 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함이 말씀안에서 성도들에게 부여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이 상대적인 불합리성으로써의 은혜를 위한 죄의 필요성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쌍방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의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印)쳐진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와 함께 죽었으며 다시 살았다는 그 믿음은 현실적인 상대적 연속성에서 부당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존재에 관한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 잡아 복종케하심의 너무나 합당함을 읽으며 증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이하에서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판단과 사고가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이 상대적 판단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을, 은혜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고 할 때에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 합리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을 고려하지 못하는 그것에서, 존재의 확실성에 의문과 논쟁에 잡히며 은혜를 위해서는 죄라도 요구되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내어주는 죄의 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에 따른 의의 종의 자리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의의 병기가 될 것인지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고 이미 그러한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는 열매 그리스도를 이미 받았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실 은혜의 법이라고 함의 사실을 조롱거리로 여겨 분란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종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연약함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사실로 믿는다고 하면 그는 진정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의 자리에 결코 서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연약함과 우리 모두의 성숙해 나감이라고 함에 있어서 겸손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우리 성도들의 머리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롬 4:25)를 마음에 두면서 그 가운데서의 우리의 존재의식의 정당성을 찾아 판단하며 합리성의 정체성과 사실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체성과 사실을 진실로 말할 수 있다고 함을 기억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시는 가운데, 핑계치 못하는 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주의 의의 병기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6:1-23
종된 자의 자기(自己) 정체성
우리의 삶 속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나 주체적으로 해 나가는 일들에 있어서 그 방법론에 대한 재고를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방법론이 좋다는 개념만으로 취득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기에는 이르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방법론이 좋다고 하여도 그 방법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에 대한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법론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고후 10:5)이 전제되어진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존재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그의 삶의 정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고자 하는 그 합리적인 생각들의 정체성도 옳은 모습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게 하심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종 된 자로서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지는 성도들의 종된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서 5장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음에 대한 언급에서 이어지는 말씀인데, 반문되어질 수 있는 말로써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써 사도 바울은 6장의 증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반문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면서 그러한 것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장사되어진 자의 실제적인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의 상관성에서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유하다는 것과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고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것과 은혜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은혜아래 있다고 함을 인하여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서 반문되어질 수 있었던 은혜를 위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 좀더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그 받는 자의 종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바가 된 외적인 공통된 신앙고백이라고 함을 전제로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 바가 된 자들로써의 우리 성도들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드려진 자에게 있게 되어지는 열매를 생각하게 하며 언급을 맺고 있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의의 종이 된 자에게 거룩하게 하는 열매를 얻었다고 함을 말하며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종의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행함의 결과들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공허한 허영의 집’(호 5:8)에서의 깨닫는 자로써 슬픔의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마땅히 품어야 할 생각들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기본적인 생각’(고후 10:5)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의의 병기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준비하게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 가지 주목할 수 있는 기구가 있는데, 그것은 ‘통발’이라는 것입니다. 그 ‘통발’은 “가는 댓조각이나 싸리를 엮어서 통같이 만든 고기잡이 기구. 아가리에 작은 발을 달아 날카로운 끝이 가운데로 몰리게 하여 한번 들어간 물고기는 거슬러 나오지 못하게 하고 뒤쪽 끝은 마음대로 묶고 풀게 되어 있어 안에 든 물고기를 꺼낼 수 있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보내심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할 때에 그 생각이라고 함, 특히 인생의 존재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생각이라고 함을 사로잡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그러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이 없는 합리성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피곤하게 하여서 손들게 하는 그러한 개연적인 포기상태를 이용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고라고 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가질 때에 참된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분명히 함에서 상대적으로도 복음이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고라는 개념 우리 인생에 대한 존재 이해가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만 규정되어져서 항상 여지를 남겨두는 가운데서 정체성을 말하지 못하고 그 정체성을 말하는 자들에게 정죄하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6장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은 한 반론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상대적으로는 은혜를 위한 죄의 가능성과 필요성이라고 함까지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롬 5:20; 롬 6:1)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실제의 상황에서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서 은혜로 전환하게 되어지는 현상을 말하게 되어지며 앞서 언급한 판단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실제로서의 삶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판단의 사실들이 성도들을 심판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자신이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기름 부어 성별케 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보내시는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 의롭다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그 의로움은 상대적으로 판단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측면에서 활동하게 되어지는 권세와 사실을 분별하며 사실화 시켜나가는 그리고 그 사실을 합당하게 증거하는 자의 권세를 받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자존적 정당함이 말씀안에서 성도들에게 부여되어진 것입니다.
마치 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이 상대적인 불합리성으로써의 은혜를 위한 죄의 필요성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쌍방의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의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印)쳐진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와 함께 죽었으며 다시 살았다는 그 믿음은 현실적인 상대적 연속성에서 부당하게 보이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존재에 관한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 잡아 복종케하심의 너무나 합당함을 읽으며 증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이하에서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존재에 대한 판단과 사고가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이 상대적 판단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을, 은혜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된다고 할 때에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 합리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을 고려하지 못하는 그것에서, 존재의 확실성에 의문과 논쟁에 잡히며 은혜를 위해서는 죄라도 요구되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내어주는 죄의 종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체적 정당함에 따른 의의 종의 자리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의의 병기가 될 것인지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고 이미 그러한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는 열매 그리스도를 이미 받았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실 은혜의 법이라고 함의 사실을 조롱거리로 여겨 분란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종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연약함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사실로 믿는다고 하면 그는 진정 주제파악도 못하는 종의 자리에 결코 서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연약함과 우리 모두의 성숙해 나감이라고 함에 있어서 겸손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우리 성도들의 머리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의미(롬 4:25)를 마음에 두면서 그 가운데서의 우리의 존재의식의 정당성을 찾아 판단하며 합리성의 정체성과 사실도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정체성과 사실을 진실로 말할 수 있다고 함을 기억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시는 가운데, 핑계치 못하는 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귀한 주의 의의 병기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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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