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8:12-39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이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는 것을 소위 청혼을 받았다 ‘프로포즈(propose)’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일반적으로 그 청혼을 받을 때에 그 분위기가 좋은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형성이 되어지면 더할 나위없는 좋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되지 못할 때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또 정식 청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좀더 예를 든다고 하면, 둘만의 공간에,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는 바쁘고 고달픈 가운데서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날 수도 있고 청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상대방에게 본의 아니더라도 볼멘소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을 돌려, 우리 주님의 청혼하심 즉 교회가 신부가 되어지고 그 교회의 신랑으로서 오셨으며 오심에 있어서 그 청혼하심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서 읽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을 형제로서 부르면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을 말하며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임을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녀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함과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보이지 못한 소망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과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에 따른 섭리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예정하심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반문과 함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가운데 정죄할 자가 없을 것과 그것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현실적으로 잔혹한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 되어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은혜로 넉넉히 이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의 고백적인 증거로써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이라고 함의 이해와 그러한 신앙윤리라는 개념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협력이라고 하는 것이 회의적인 모습이 들 수 있다는 심정과 이러한 모습과 정체성에서 주님의 신부된 자들로서의 교회의 모습과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회의적인 모습을 사도 바울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넉넉히 이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신부된 자로서의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는 가운데서 자포자기적인 생각과 그것으로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이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말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습에 신랑되신 예수님의 프로포즈, 청혼하심, 함께 일어나 가자고 하신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중매쟁이로서의 사도 바울은 해석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파들, 독특한 성격의 성도들의 개개인의 모습들, 그들을 인도하는 리더십의 차이, 믿음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차이들, 어쩌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있을 수도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임의적인 자성적 비판에 대하여서 답변하는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마지막 전도여행으로써 로마로 여행하는 가운데서 그가 탄 배가 파선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을 전제로 하여서 본문을 말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절 아후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가운데 처음 탄 배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였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는 배,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드라뭇네노’라는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탐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진 그러한 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배를 타게 되어지는 것은 그 전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어질 것으로써의 성례전적인 의미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호가 오히려 죽음의 공회적 실제의 파선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배라는 개념이 성례전적인 공회의 한 표현을 말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그 실제는 그 안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함께했던 자들이 그 죽음의 공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그 예표적 의미를 다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알렉산드리아 호에서 사도 바울은,비로소 이때부터 예정적 뜻하심을 깨달은 것은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은혜를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가 행선자를 다 사도 바울에게 주었고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이미 예정하심의 말씀하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섬에 걸리리라는 말씀하심의 실증적 측면의 예표적 실제도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행 27:23~26)
그처럼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들은 그 신앙의 정체성과 신앙윤리적 정체성에 따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에 있어서 분란이 있어 옴을 볼 때에 그러한 것을 지적받고 있는 즈음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볼 때에 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어떤 속담에서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뜻하심의 따른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없는 ‘아드라뭇네노’와 같은 즉, ‘죽음의 공회’라는 생명력이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라고 함을 사도 바울은 잊지 않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그러한 죽음의 공회라는 개념의 판단이 있게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도, ‘성도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입은 성도들은 우리가 낙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고 함의 불연속성에서 판단할수 없지만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그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이루실 것을 믿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시고 있는데(34절), 이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기억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앞서 말한 그 말의 정당함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형식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성도들의 연합하지 못하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죽음의 공회적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형식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예정하심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을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승리라고 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정하심에서의 상대적 표현을 취할 때에 넉넉히 이기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5)
주인되고 남편된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호세아를 통하여 회유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거친 들에서.. 이것과 같이 분위기 없는 그러한 청혼과 같은 모습에 자꾸 상대적인 실제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것들의 실제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한 주님의 프로포즈는 우리 인생의 청혼의 개념과 달리 나타난다고 하여도 진정 절대의 신실하심을 통하여서 말씀하신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참된 청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그러한 판단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증거는 이처럼 호세아, 하나님의 구원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다시 읽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청혼하심의 신실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이라고 함이 요원하여 보인다는 상대적 실제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의 신부되어진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힘들어 보이는 피곤하고 바쁜 생존세계에서, 주님의 함께 가자시는 청혼의 말씀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랑 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예정하신 가운데서 성도의 넉넉히 이기게 하심의 뜻하심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참되게 주님과 동행하며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지혜 있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8:12-39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이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부터 결혼 제안을 받는 것을 소위 청혼을 받았다 ‘프로포즈(propose)’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일반적으로 그 청혼을 받을 때에 그 분위기가 좋은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형성이 되어지면 더할 나위없는 좋은 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되지 못할 때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또 정식 청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좀더 예를 든다고 하면, 둘만의 공간에,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령 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는 바쁘고 고달픈 가운데서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화가 날 수도 있고 청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상대방에게 본의 아니더라도 볼멘소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생각을 돌려, 우리 주님의 청혼하심 즉 교회가 신부가 되어지고 그 교회의 신랑으로서 오셨으며 오심에 있어서 그 청혼하심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통하여서 읽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을 형제로서 부르면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을 말하며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함을 말하는 자들임을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녀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함과 장차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보이지 못한 소망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말씀하시고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과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에 따른 섭리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31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러한 예정하심 속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반문과 함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가운데 정죄할 자가 없을 것과 그것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현실적으로 잔혹한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진 가운데 되어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은혜로 넉넉히 이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의 고백적인 증거로써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이라고 함의 이해와 그러한 신앙윤리라는 개념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연합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협력이라고 하는 것이 회의적인 모습이 들 수 있다는 심정과 이러한 모습과 정체성에서 주님의 신부된 자들로서의 교회의 모습과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회의적인 모습을 사도 바울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도의 넉넉히 이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신부된 자로서의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는 가운데서 자포자기적인 생각과 그것으로 주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선한싸움이라고 하는 것의 실상을 말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습에 신랑되신 예수님의 프로포즈, 청혼하심, 함께 일어나 가자고 하신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중매쟁이로서의 사도 바울은 해석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파들, 독특한 성격의 성도들의 개개인의 모습들, 그들을 인도하는 리더십의 차이, 믿음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차이들, 어쩌면, 오늘날 주의 몸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있을 수도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임의적인 자성적 비판에 대하여서 답변하는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마지막 전도여행으로써 로마로 여행하는 가운데서 그가 탄 배가 파선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을 전제로 하여서 본문을 말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절 아후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가운데 처음 탄 배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였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가는 배,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드라뭇네노’라는 뜻은 ‘죽음의 공회’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를 탐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진 그러한 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배를 타게 되어지는 것은 그 전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게 되어질 것으로써의 성례전적인 의미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호가 오히려 죽음의 공회적 실제의 파선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배라는 개념이 성례전적인 공회의 한 표현을 말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그 실제는 그 안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함께했던 자들이 그 죽음의 공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그 예표적 의미를 다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알렉산드리아 호에서 사도 바울은,비로소 이때부터 예정적 뜻하심을 깨달은 것은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은혜를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가 행선자를 다 사도 바울에게 주었고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을 말씀하심에서 이미 예정하심의 말씀하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섬에 걸리리라는 말씀하심의 실증적 측면의 예표적 실제도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행 27:23~26)
그처럼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들은 그 신앙의 정체성과 신앙윤리적 정체성에 따른 믿음의 분량이라고 함에 있어서 분란이 있어 옴을 볼 때에 그러한 것을 지적받고 있는 즈음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볼 때에 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어떤 속담에서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뜻하심의 따른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수 없는 ‘아드라뭇네노’와 같은 즉, ‘죽음의 공회’라는 생명력이 없는 그러한 자리에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회 성도의 교제와 협력이라고 함을 사도 바울은 잊지 않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그러한 죽음의 공회라는 개념의 판단이 있게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도, ‘성도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존재적 정당함을 입은 성도들은 우리가 낙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이라고 함의 불연속성에서 판단할수 없지만 그러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그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이루실 것을 믿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하시고 있는데(34절), 이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기억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앞서 말한 그 말의 정당함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형식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상대적인 판단에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해서 성도들의 연합하지 못하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죽음의 공회적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형식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으로도 절대의 예정하심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에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을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승리라고 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정하심에서의 상대적 표현을 취할 때에 넉넉히 이기심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5)
주인되고 남편된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호세아를 통하여 회유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아골 골짜기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거친 들에서.. 이것과 같이 분위기 없는 그러한 청혼과 같은 모습에 자꾸 상대적인 실제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것들의 실제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한 주님의 프로포즈는 우리 인생의 청혼의 개념과 달리 나타난다고 하여도 진정 절대의 신실하심을 통하여서 말씀하신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참된 청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그러한 판단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증거는 이처럼 호세아, 하나님의 구원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다시 읽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청혼하심의 신실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협력하여 선을 이룸이라고 함이 요원하여 보인다는 상대적 실제와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의 신부되어진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 힘들어 보이는 피곤하고 바쁜 생존세계에서, 주님의 함께 가자시는 청혼의 말씀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랑 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으로 예정하신 가운데서 성도의 넉넉히 이기게 하심의 뜻하심을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참되게 주님과 동행하며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지혜 있는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