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2월 07, 2005

천국과 아브라함

2005년 2월 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3:1-17
천국과 아브라함

한동안 춥던 추위도 지나고 입춘도 지난 시점에서 봄을 말할 수 있는, 기대하게 되는 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서 특히 새로운 생명들의 새싹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사실들을 증거하며 그 사실들의 실제를 주목하게 되어지는 사건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그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구약의 엘리야로서 주께 평가받게 되어지는 이 세례요한의 증거에서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보여지면서도 실상의 그 연속성이 마치 씨앗과 그 생명을 가진 씨앗으로부터 발아하여 성장하는 식물의 연속성을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은 증거의 시초를 주목하게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때, 즉 예수님께서 유아학살을 피하시고 애굽에서 돌아오셔서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실 때, 세례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함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는 것과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있어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함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요한의 모습에 대한 간략한 기술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나와 그에게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함의 언급으로 신랄하게 책망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말하고 아브라함의 자손됨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뒤에 오실 분에 대한 언급이 기술되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졌고 또한 그 정황이라고 함이 함께 기술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례요한의 증거가 천국의 임함에 대한 증거인데,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에 대한 것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로서의 세례를 집행함으로써의 증거를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개념의 차이라는 것에 대하여서 세례요한이 분명히 하려고 함에 대한 것과 자신 뒤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세례가 천국복음의 내용임을 의미함으로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정체성이라고 함은 이미 주님께서 구약의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요한 그 사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도의적 차원에서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존적 정당하심에서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서 그 예언에 대한 증거자로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라는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의 존재적 정체성이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의 증거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가 아브라함을 말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아브라함의 의를 말하고 있고 그 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동일함을 말하고 있고 그러한 전제로 그의 사상적 측면의 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4장, 롬 4:23,24)

세례요한이 전제하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것은 창세기의 말씀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렇게 기록함이 그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하는 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상대적인 현실적인 실제적 판단보다도 더 합당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 실제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지시할 땅 즉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땅이 아니라도 그 말씀하심에서 준비하시는 그 신실하심의 사실과 실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혈통적 계보에서 아브라함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었지만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았던 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이 언약적 실제와 현실적인 실제의 연속성이 항상 같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자들로서 죄악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즉 형식적인 신앙과 습관을 따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의 전통이라고 함의 범주에서 신앙의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를 믿지 못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은 항상 상대적인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에 전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자체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며 단지 그러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사람들의 동의적인 차원에서 상대적인 정당함으로 인식 가능성의 여지를 잡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그 신실하심은 그러한 것에 판단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그 절대 신실하심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의 신실하심을 믿고 주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가 회개의 열매를 맺는 열매를 가진 자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21,22)

더욱 사도 바울은 자신을 드리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그 종이 됨과 그 결과에 대한 것으로써 열매를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세례요한이 말하고 있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그 상관성과 그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동일한 열매의 분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라는 개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믿음의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혈통적 계보와 언약적인 계보가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언약적인 계보가 전통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있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인 정체성에서 전통이 그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자들은 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로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형식은 있어도 믿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사망의 열매가 그들에게 있게 되어지며 그러한 것이 옳다고 함의 그들의 모습은 독사의 자식들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세례를 증거함에 대한 것을 유대인들이 받지 못하는 사건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신앙적 열매라고 함을 주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요 8:53)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5:57~59)

세례요한이 물로 예수님께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물세례만이 아니라 성령 자신의 세례로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물론 물세례도 주께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주도록 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이라는, 존재의 상대적 있고 없음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실 것을 이 세례에서부터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 존재적 정당함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하늘에서 나신 말씀으로써 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증거하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하심의 의미인 것입니다.

즉 자신을 아들로 나타내심에 있어서 그 위격의 차이로 말씀하심에 있어서도 상대적인 인성적 표현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 소유격적인 표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정당함에서 증거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하며 천국이 임하였음에 대한 증거를 함에 있어서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상대적인 판단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가능성에 따른 상대적 동의에 의한 가운데 임의적으로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의 복음을 그런 식으로 개연적인 것으로 따른다면 세례요한이나 사도 바울의 증거에서 읽게 되어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과 이미 가졌음에 대한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자들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또한 증거하는 주님에 대한 증거도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 상대적이면서도 합당한 실제로서의 사실로써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복음(눅 16:22~23)에서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찾을 때에 예수님이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사실의 확실성을 하나님의 자존적 신실하심에서 찾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불가지론의 상대적 정당함을 따른 합리성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에서 우리의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잘 알려진 ‘여호와 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믿지 못하는, 거짓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확신한다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절대자이심을 믿으며 주님의 자존적 절대 신실하심을 의지하시는 가운데서 회개의 열매를 이미 받은 자들로서 세례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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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