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16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롬11:1-24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세계 농수산물 수입 자유화에 따른 우리나라의 농업과 같은 업종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책 중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과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고 또한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내는 것과 품종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경쟁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예로써, 이웃나라의 개발된 딸기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딸기품종으로 선택하는 그러한 사례를 소개함을 보았는데, 적극적인 권유적인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일상적인 용어가 어떤 특수한 용어로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옛 농촌문화가 일상적인 경우에서는 어떤 품앗이 또는 농촌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로써 자리매김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예농업을 하시거나 또는 화초를 가꾸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알려진 것이지만 그렇게 일상적인 용어로 오늘날 언급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현상적인 현실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돌감나무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며 이처럼 접붙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10장에 내용을 의식하면서 이끌어내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비리셨느냐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고 함에 대한 언급과 함께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언급하며 엘리야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즉 혼자만 남았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상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음을 다윗의 언급을 인용하여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실족에 대한 의미를 재고할 수 있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읽을 수 있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한 언급과 비유되어질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자긍하지 말 것과 원 가지의 접붙임이라고 함이 더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접붙임이라고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유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주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임을 나타내며 교회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접붙임이라고 하는 성격을 알게 될 때에 그 교회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은 로마서 10장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 즉 10장에서는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책망과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음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열심이라고 함을 규정받을 때에, 그러면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열심이라고 함과 믿음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논하는 판국에 모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인식적인 판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연약함을 받아서 분명하게 먼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어서 결코 남은 자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엘리야의 현상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 즉, 자기 외에 아무도 믿는 자가 없다는 것과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정황의 인식판단의 강요를 받는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두신 뜻하심에서 받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 섭리의 사실이 지금의 판단 강요보다도 더 실제적이며 분명한 사실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제 두 부류로서 히브리파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파 성도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당위성으로 진행되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 성도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도의 변함없는 신실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의 표현적 증거로써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거룩함으로 먼저 전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이제 현상적인 두 민족적 형태로서의 현상적 충돌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서의 그 성도됨의 모습이라고 함을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구약의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두도록 하는 중심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슥 4:11~5:4)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슥 4:11~5:4)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가 본 예언에서 하나님께 질문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나타나는 두 시대의 한 국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소속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서 선지자에게 이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 4:14)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하게 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게 되어지는 이상 중에서는 두루마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두 가지 저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라는 것과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라고 함인데 이것은 구약의 십계명에 대한 것과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심과 이에서 지나 악에 치우칠 것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도적의 집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들에게도 들어가 저주가 머물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십계명에 대한 것과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성도의 삶에 총체적인 기도가 되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하심과 같이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신구약의 성도들의 모습과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죽음의 공회라고 할 수도 있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는 현상적 실제의 판단으로써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받게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출신의 크리스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접붙임의 능력이라고 함이 하나님께 있다고함을 말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과 예수그리스도 성부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에서 있게 되어짐에서 그 권위적,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파생되는 권위에서, 상대적인 판단의 이의로 말미암은 현상적 판단에 실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심과 그러한 것이 겸손함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떤 경지에 이른다고 함에서 어떤 경건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꺾이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면 천국갈 수 있다는 식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전제는 이미 잘못인 것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꺾이움,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이방인의 충만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두 부류의 성도들의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이방인의 부요함과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언급에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같이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넘어져 실족하지 않을 것에 대한 언급(롬 11:8)을 마음에 두고,이방인들이 나중에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집단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 자체의 대대적인 회개라고 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어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의 부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의 완전성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의 넘어짐에서 은혜의 실제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스가랴의 증거와 같이 등대잔 좌우에 위치한 것으로써 중보자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들로서의 수를 말씀하심으로 그 온전케 되어짐의 종들이 돌아옴이 바로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의 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사도 바울은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그 정당함에 재가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롬 11:23)
말씀을 맺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라는 그 선지자 스가랴의 질문은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로써 표현하고 있고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동일한 성도들이며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믿음과 행함에’, ‘신앙과 윤리에’ 대한 연속성이라고 함을 바르게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면, 그 충만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지금도 ‘계시를 담지한’ 이스라엘이 있을 것을 상정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한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개념의 분별없는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협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예정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들, 즉 신앙의 고백들이 다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협력하여 이룰 선이 없다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냐 행함이냐는 그러한 불연속성의 상대적 완전성을 지나 절대에 영역에 이르러야 한다는 경건의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의 굴레에서 자유하면서도 더욱 신실한 경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말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가운데서 참으로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이라고 함의 판단으로 협력의 선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경건이라고 함의 완전함을 들어서 정죄하는 것과 또한 개연적인 신비적 개념의 믿음으로 성도들의 인식의 사실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참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 앞에서, 인식의 불연속적인 생각들로 나타날 수 이러한 감람나무들의 모습들로써 접붙임의 은혜가 나타날 때에 못하겠다는 개념으로 충성치 못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참되게 믿음으로 충성하시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은혜의 돌감람나무들로써 주께서 받으실 열매를 맺는 귀한 은혜의 성도들로써 종들이 되시는 은혜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롬11:1-24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세계 농수산물 수입 자유화에 따른 우리나라의 농업과 같은 업종이 타격을 받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책 중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과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고 또한 농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상당히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내는 것과 품종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경쟁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예로써, 이웃나라의 개발된 딸기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딸기품종으로 선택하는 그러한 사례를 소개함을 보았는데, 적극적인 권유적인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일상적인 용어가 어떤 특수한 용어로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옛 농촌문화가 일상적인 경우에서는 어떤 품앗이 또는 농촌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로써 자리매김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예농업을 하시거나 또는 화초를 가꾸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알려진 것이지만 그렇게 일상적인 용어로 오늘날 언급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현상적인 현실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돌감나무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며 이처럼 접붙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10장에 내용을 의식하면서 이끌어내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비리셨느냐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고 함에 대한 언급과 함께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언급하며 엘리야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즉 혼자만 남았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상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음을 다윗의 언급을 인용하여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실족에 대한 의미를 재고할 수 있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읽을 수 있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넘어짐에 대한 언급과 비유되어질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자긍하지 말 것과 원 가지의 접붙임이라고 함이 더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접붙임이라고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유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주 안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임을 나타내며 교회의 모습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접붙임이라고 하는 성격을 알게 될 때에 그 교회의 모습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은 로마서 10장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 즉 10장에서는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책망과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음에 대한 책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열심이라고 함을 규정받을 때에, 그러면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열심이라고 함과 믿음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논하는 판국에 모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판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인식적인 판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연약함을 받아서 분명하게 먼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있어서 결코 남은 자가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엘리야의 현상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 즉, 자기 외에 아무도 믿는 자가 없다는 것과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정황의 인식판단의 강요를 받는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겨두신 뜻하심에서 받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 섭리의 사실이 지금의 판단 강요보다도 더 실제적이며 분명한 사실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제 두 부류로서 히브리파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파 성도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당위성으로 진행되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 성도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성도의 변함없는 신실성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의 표현적 증거로써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거룩함으로 먼저 전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이제 현상적인 두 민족적 형태로서의 현상적 충돌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즉 이스라엘과 이방인들로서의 그 성도됨의 모습이라고 함을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구약의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두도록 하는 중심으로 이 말을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슥 4:11~5:4)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슥 4:11~5:4)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가 본 예언에서 하나님께 질문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있어서 나타나는 두 시대의 한 국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소속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서 선지자에게 이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슥 4:14)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하게 되어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나게 되어지는 이상 중에서는 두루마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두 가지 저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라는 것과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라고 함인데 이것은 구약의 십계명에 대한 것과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심과 이에서 지나 악에 치우칠 것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도적의 집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들에게도 들어가 저주가 머물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십계명에 대한 것과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성도의 삶에 총체적인 기도가 되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하심과 같이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신구약의 성도들의 모습과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가운데서는 죽음의 공회라고 할 수도 있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일 수도 있는 현상적 실제의 판단으로써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받게 되어지는 로마의 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로서의 크리스천과 헬라출신의 크리스천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접붙임의 능력이라고 함이 하나님께 있다고함을 말함으로써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과 예수그리스도 성부하나님의 그 구원하심에서 있게 되어짐에서 그 권위적, 자존의 절대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파생되는 권위에서, 상대적인 판단의 이의로 말미암은 현상적 판단에 실제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하심과 그러한 것이 겸손함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떤 경지에 이른다고 함에서 어떤 경건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꺾이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면 천국갈 수 있다는 식을 전제로 해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전제는 이미 잘못인 것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꺾이움,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이방인의 충만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두 부류의 성도들의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이방인의 부요함과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언급에서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같이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넘어져 실족하지 않을 것에 대한 언급(롬 11:8)을 마음에 두고,이방인들이 나중에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집단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 자체의 대대적인 회개라고 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어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의 부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의 완전성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의 넘어짐에서 은혜의 실제라고 함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스가랴의 증거와 같이 등대잔 좌우에 위치한 것으로써 중보자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신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들로서의 수를 말씀하심으로 그 온전케 되어짐의 종들이 돌아옴이 바로 충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을 떠나서의 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정당함으로 이루신 것이기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사도 바울은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에 대한 그 정당함에 재가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롬 11:23)
말씀을 맺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라는 그 선지자 스가랴의 질문은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로써 표현하고 있고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동일한 성도들이며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믿음과 행함에’, ‘신앙과 윤리에’ 대한 연속성이라고 함을 바르게 알도록 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하면, 그 충만이라고 함을 인위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지금도 ‘계시를 담지한’ 이스라엘이 있을 것을 상정하는 어리석음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한 행함이냐 믿음이냐는 개념의 분별없는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가운데서 현실적인 협력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신실하심에서 예정하심을 믿을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들, 즉 신앙의 고백들이 다양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협력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협력하여 이룰 선이 없다는 것에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냐 행함이냐는 그러한 불연속성의 상대적 완전성을 지나 절대에 영역에 이르러야 한다는 경건의 도덕적 완성이라고 함의 굴레에서 자유하면서도 더욱 신실한 경건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권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라는 말은 ‘세력’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과 같이 죄라고 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가운데서 참으로 상대적인 인식의 불연속성이라고 함의 판단으로 협력의 선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경건이라고 함의 완전함을 들어서 정죄하는 것과 또한 개연적인 신비적 개념의 믿음으로 성도들의 인식의 사실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참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 앞에서, 인식의 불연속적인 생각들로 나타날 수 이러한 감람나무들의 모습들로써 접붙임의 은혜가 나타날 때에 못하겠다는 개념으로 충성치 못한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참되게 믿음으로 충성하시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은혜의 돌감람나무들로써 주께서 받으실 열매를 맺는 귀한 은혜의 성도들로써 종들이 되시는 은혜위에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