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11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욜2:1-32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젊은 사람이 꿈과 야망이라고 하는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서 어쩌면 질타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성에 대한 판단으로 좌절되거나 또는 평가되어질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면서도 이상의 방향성만큼은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상을 말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젊은이의 이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말에 있어서 정황적 배경이라고 함에 따라서 동일한 표현도 다른 뜻한 바의 내용적 실제를 담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젊은이의 이상에 대한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엘서는 이상이라고 함을 어떤 주술적인 신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거나 또는 잘못된 접신적 개념의 성령론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언어학적인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것보다 달리 본문이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하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은 날임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것을 대면하는 자들의 얼굴이 하얘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큰 군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여호와의 말씀에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고 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백성들을 모아서 그 회를 거룩하게 하고 소아와 젖먹이는 자들과 신랑과 신부가 그 방에서 골방에서 나오도록 제사장들을 낭실에서 회개할 것과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땅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며 그로 인한 풍성함과 기이히 대접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며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심으로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푸심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해가 어두워지고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과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1절,15절)는 표현이 두 번 언급되어지며 ‘그후에’(28절)라는 측면에서의 동일한 내용의 전반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가운데서 그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들과 우리 성도들의 주의 뜻하심을 받음에 대한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호세아 선지자가 북쪽 이스라엘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과 달리, 남쪽 유다족속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는 대 전제적 말씀 안에서 총체적인 계시적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두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뜻이고 ‘요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셈족 계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이름적 내용이라고 함이 삶의 존재적 증거의 형태라는 것으로 나타내실 때도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이 선지자의 존재적 증거로서 읽게 되어진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즉 해석하면 ‘하나님의 보여주심에 있어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과 같은 신앙’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부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계시적 총체적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과 동일한 내용적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본문에서는 종말에 때에 대하여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언근하고 총체적인 언급을 같이하고 있는데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으로 두 부류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라는 언급과는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는 곳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임을 이사야와 미가서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2:3; 미 4:2)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그 율법이라고 함을 준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행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윤리라는 것과 인생의 윤리의식을 모두 칭하는 곳으로서의 시온을 말하며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 그리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주신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알려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의 중심과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참된 구원이 있게 되어질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받을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그 심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행함에서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회개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돌이키심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주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따른 기이한 대접을 인하여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심에 따라서 주의 몸된 교회에 성령의 부어주심의 외적 공식적 표현에서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자가 되어지는데 ‘보라 하나님의 큰일이로다’(행 2:11)라고 외침이 본문의 말씀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속의 때 말세의 때에 그 믿음이 없음에 대한 탄식을 하셨던 주님의 마음이라고 함과 판단이라고 함이 요엘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부류에게 불게 되어지는 시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되어질 일들이 하나님의 신으로 인하여서 자녀들이 장래를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불확실한 실제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장래를 말한다는 것은 구속하심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시온이라는 주의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자녀들 주의 말씀으로 낳은 종들이 주의 말씀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앞으로 주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라고 하심은 역시 동일한 표현으로써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그의 힘의 기력이 다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으로써 직접적인 행함의 사실로써 증거하는 증거인들이 될 수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그 소망의 실제를 기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달란트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하며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가르쳐주심에 따른 예비함이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이 있게 되어지는 때를 의미하는데 그 앞서 있게 되어지는 징조들은 해가 어두워질 것에 대한 것과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는 때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시는 예수님(말 4:2, 눅 1:78)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마음에 두지 못하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주의 복음의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는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는 성도의 모든 권세가 깨어지는 때(단 12:7)를 말씀하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달빛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신 예수님(말 4:2, 눅 1:78)과 상반되어진 자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전혀 상관없는 자들과 같은 자들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기만적으로 행함이 생명을 앗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함이 부인할 수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주장하여 악을 범하게 되어지는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그들의 자위적 정당함은 시간이라고 함 때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해와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의무를 행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해와 달의 기준으로 보게 되어지는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과 달리 임의적 시간관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일반적인 역사 가운데 주의계시가 나타남에 대하여서 부정할 수 있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역사적인 실존인물인가? 하나님에 대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문학적 인식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 아닌가 그러한 것도 모두 이러한 잘못된 시간관을 가지고 역사를 말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복음을 비평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태양신을 심기는 것과 같은 악한 현대사상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들 그러한 것과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행하는 삶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온으로서의 구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즉 첫 번째 시온에서 부는 나팔 소리에서 주의 심판하심과 회개하심의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온에 부는 나팔에 대한 증거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함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 참되게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리에 서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지닌 자들로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자들로서의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심에 대하여서 많은 이의를 재기하며 반대하여 왔고 그것이 역사 비평학의 기본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서 그 곳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알 수 없는 빽빽한 구름과 캄캄함이 있는 곳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 사단의 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재가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그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복음의 자녀들로서 장래를 말하게 되어질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소망의 부요함을 그 특별하게 증거적 소명을 맞지 않는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도 즐거워할 것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이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며 그 실천을 준비하며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엑스타시와 같은 경우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정신 차린 말을 함을 주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행 26:24)
참으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에 두면서, 참되게 주의 구원에 합당한 종들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가운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이상을 보는 주 안에서의 젊은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욜2:1-32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젊은 사람이 꿈과 야망이라고 하는 이상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하여서 어쩌면 질타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성에 대한 판단으로 좌절되거나 또는 평가되어질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면서도 이상의 방향성만큼은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인 측면에서 이상을 말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젊은이의 이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둔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질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말에 있어서 정황적 배경이라고 함에 따라서 동일한 표현도 다른 뜻한 바의 내용적 실제를 담는 것과 같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젊은이의 이상에 대한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엘서는 이상이라고 함을 어떤 주술적인 신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거나 또는 잘못된 접신적 개념의 성령론을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언어학적인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것보다 달리 본문이 말씀하심에 대한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하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은 날임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것을 대면하는 자들의 얼굴이 하얘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큰 군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여호와의 말씀에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고 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백성들을 모아서 그 회를 거룩하게 하고 소아와 젖먹이는 자들과 신랑과 신부가 그 방에서 골방에서 나오도록 제사장들을 낭실에서 회개할 것과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땅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과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며 그로 인한 풍성함과 기이히 대접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8절에서 3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후에’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며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심으로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푸심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써 해가 어두워지고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과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1절,15절)는 표현이 두 번 언급되어지며 ‘그후에’(28절)라는 측면에서의 동일한 내용의 전반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가운데서 그 종말의 때에 있게 되어지는 것들과 우리 성도들의 주의 뜻하심을 받음에 대한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호세아 선지자가 북쪽 이스라엘에 대하여서 예언한 것과 달리, 남쪽 유다족속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는 대 전제적 말씀 안에서 총체적인 계시적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두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뜻이고 ‘요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셈족 계통을 통하여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이름적 내용이라고 함이 삶의 존재적 증거의 형태라는 것으로 나타내실 때도 있는데 그러한 것이 이 선지자의 존재적 증거로서 읽게 되어진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
즉 해석하면 ‘하나님의 보여주심에 있어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과 같은 신앙’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부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계시적 총체적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과 동일한 내용적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본문에서는 종말에 때에 대하여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언근하고 총체적인 언급을 같이하고 있는데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으로 두 부류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라는 언급과는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는 곳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임을 이사야와 미가서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2:3; 미 4:2)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것은 그 율법이라고 함을 준행하게 되어지는 자들의 행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윤리라는 것과 인생의 윤리의식을 모두 칭하는 곳으로서의 시온을 말하며 주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 그리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주의 주신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알려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의 중심과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의 실제를 누리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참된 구원이 있게 되어질 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의 받을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그 심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행함에서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러한 회개하게 하심의 은혜가 있어서 하나님의 돌이키심의 은혜가 주권적으로 주어질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온에서 나팔을 분다는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따른 기이한 대접을 인하여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심에 따라서 주의 몸된 교회에 성령의 부어주심의 외적 공식적 표현에서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그 증거자가 되어지는데 ‘보라 하나님의 큰일이로다’(행 2:11)라고 외침이 본문의 말씀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속의 때 말세의 때에 그 믿음이 없음에 대한 탄식을 하셨던 주님의 마음이라고 함과 판단이라고 함이 요엘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부류에게 불게 되어지는 시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되어질 일들이 하나님의 신으로 인하여서 자녀들이 장래를 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불확실한 실제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장래를 말한다는 것은 구속하심에서 실제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시온이라는 주의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서의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의 자녀들 주의 말씀으로 낳은 종들이 주의 말씀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앞으로 주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라고 하심은 역시 동일한 표현으로써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그의 힘의 기력이 다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으로써 직접적인 행함의 사실로써 증거하는 증거인들이 될 수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그 소망의 실제를 기뻐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달란트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하며 주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가르쳐주심에 따른 예비함이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러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이 있게 되어지는 때를 의미하는데 그 앞서 있게 되어지는 징조들은 해가 어두워질 것에 대한 것과 달빛이 핏빛으로 변하는 때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시는 예수님(말 4:2, 눅 1:78)에 대하여서 사람들이 마음에 두지 못하는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하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주의 복음의 증거의 능력을 상실하는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에서는 성도의 모든 권세가 깨어지는 때(단 12:7)를 말씀하심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달빛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의로우신 태양으로 오신 예수님(말 4:2, 눅 1:78)과 상반되어진 자들 예수님에 대하여서 전혀 상관없는 자들과 같은 자들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기만적으로 행함이 생명을 앗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함이 부인할 수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주장하여 악을 범하게 되어지는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그들의 자위적 정당함은 시간이라고 함 때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해와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의무를 행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해와 달의 기준으로 보게 되어지는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과 달리 임의적 시간관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일반적인 역사 가운데 주의계시가 나타남에 대하여서 부정할 수 있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역사적인 실존인물인가? 하나님에 대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문학적 인식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 아닌가 그러한 것도 모두 이러한 잘못된 시간관을 가지고 역사를 말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복음을 비평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되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태양신을 심기는 것과 같은 악한 현대사상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오심에 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들 그러한 것과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행하는 삶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온으로서의 구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즉 첫 번째 시온에서 부는 나팔 소리에서 주의 심판하심과 회개하심의 대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온에 부는 나팔에 대한 증거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함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어지며 그러한 가운데서 참되게 주의 말씀하심을 따라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리에 서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지닌 자들로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이라는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자들로서의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심에 대하여서 많은 이의를 재기하며 반대하여 왔고 그것이 역사 비평학의 기본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행하는 가운데서 그 곳에서는 진정한 사실을 알 수 없는 빽빽한 구름과 캄캄함이 있는 곳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그 사단의 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과 그 신실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재가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그 중심을 가지게 되어지는 복음의 자녀들로서 장래를 말하게 되어질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소망의 부요함을 그 특별하게 증거적 소명을 맞지 않는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도 즐거워할 것과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뜻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이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며 그 실천을 준비하며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엑스타시와 같은 경우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사실을 말함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정신 차린 말을 함을 주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행 26:24)
참으로,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주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에 두면서, 참되게 주의 구원에 합당한 종들로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는, 길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가운데 생명과 평안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이상을 보는 주 안에서의 젊은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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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