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하 2:1-11
갑절의 영적감동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이 웃음을 창조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인데, 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통한 어떤 복에 대한 개념이 동양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나 또는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들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적 개념에 익숙해진 가운데서, 현대의 삶의 바쁨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것에 대한 간과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락을 통한 노력들이고 직업적인 정신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개그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그에서도 사실 여러 차원이 있어, 색다른 개그를 구사하는 실력들로서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긍정적 사회 문화로서 이해하게 되는데, 개인적이면서도 어쩌면 공적인 측면에서의 시비라기보다는 지나친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차원이 다른 개그를 말함에 있어서, '허무개그'를 말할 수 있는데,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서 웃기지 않는 것을 웃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그래서 황당하다는 개념에서 비로소 웃음을 말하는 중심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재 선정에 있어서 한번은 신앙의 구원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전근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개그행위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즉 '나 9원 받았네..', 땅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나 10원 주었네.. 받았네..' 그것도 신앙의 기도적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언급하는 것이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실제적 모습이라는 비유적 개그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허무개그적 개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적 발상에 대해서 한편은 상당히 불편하고 질책할 수도 있으면서도 실제의식이 결여되어진 사회속에서 불가지론적 개념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사회의 인식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에, 질책보다는 불쌍히 여김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의 은혜적 사모함이 바른 자리매김으로 세상에 빛을 비출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마음을 두어야함이 옳다고 함을 인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목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시려고 할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 나가는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따르게 되어지고 이와 같이해서 벧엘에 가고 또 여리고까지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서는 선지생도들의 말과 엘리사의 말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라는 말과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가는데, 엘리사가 따르는 모습을 첫 번째 본문의 형식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요단의 선지생도들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엘리사의 답변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가에 이 두 사람이 서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함에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엘리야 자신에게는 어려운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취하시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증인의 전인격적인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또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적 흐름에서 주목하면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고백이 있게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로 인해서 두려워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새 힘을 얻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아합왕의 아들 아하시아가 난관에서 떨어져 병이 나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함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계셔서 그들에게 묻는가 하는 반문과 왕이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전에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그때와는 달리 산의 공제선을 의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가림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었습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디셉사람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50부장과 그 수하들을 세차례 보내게되는데 두번까지는 모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죽였고, 세번째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하시아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가서 그 면전에서 예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시고자 할 때에 엘리야와 그를 따르고 있는 엘리사 이 두 사람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전인격적인 그들의 증거를 주목해 봅니다.
엘리야 그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 )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그 이름이 그들의 존재적 삶의 전인격적 증거임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 등장하는 가운데 좋은 이름의 악한 자의 모습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임의적 개념에서의 그러한 이름으로서의 치장적개념으로 일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중심은 전자의 입장으로서 신실한 이름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인격적 삶의 증거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God is salvation)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상관성을 추종적 동행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머물라고 함에 대한 것으로서의 그 의식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성을 나타내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개념으로서의 구원을 정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한정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실재적 개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 엘리사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흐려놓기 위해서 임의적인 신을 말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를 허구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정직하지 못한 이성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만적 개념으로 죄를 범하는 모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이슬람에서의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의 표기 '하나님'과 동일하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링크되는 글 각주 1번참고) 한국에서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슬람을 말하는 것인지를 재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중심의 신앙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필요성에서 비로소 언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하심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에 예정되어진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셈의 장막에 머물게 되는 것(창 9:27)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의 기본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전인격적인 노력과 방향과 구함의 실제적 연속성을 기반으로한, 증거를 읽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함에서 그 열매적인 풍부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된, 속된 표현으로 짝퉁, 즉 모조물이 있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중심을 흐려놓게 되는 시대적 정황적 악함이 있게 될 것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 그 말씀이 오늘날 시대적 인식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있으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의 시대적 정신의 발현이라고하는 그러한 악함의 모습이 있을 때에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엘리야의 전인격적 신앙이 그 신앙의 그 구원의 열매의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하 2:1-11
갑절의 영적감동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이 웃음을 창조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에 대한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인데, 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통한 어떤 복에 대한 개념이 동양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나 또는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들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적 개념에 익숙해진 가운데서, 현대의 삶의 바쁨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러한 것에 대한 간과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락을 통한 노력들이고 직업적인 정신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는 개그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그에서도 사실 여러 차원이 있어, 색다른 개그를 구사하는 실력들로서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는 긍정적 사회 문화로서 이해하게 되는데, 개인적이면서도 어쩌면 공적인 측면에서의 시비라기보다는 지나친 표현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차원이 다른 개그를 말함에 있어서, '허무개그'를 말할 수 있는데, 실재적인 것이 아닌 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가운데서 웃기지 않는 것을 웃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그래서 황당하다는 개념에서 비로소 웃음을 말하는 중심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재 선정에 있어서 한번은 신앙의 구원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전근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개그행위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즉 '나 9원 받았네..', 땅에 떨어진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나 10원 주었네.. 받았네..' 그것도 신앙의 기도적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언급하는 것이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실제적 모습이라는 비유적 개그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허무개그적 개념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적 발상에 대해서 한편은 상당히 불편하고 질책할 수도 있으면서도 실제의식이 결여되어진 사회속에서 불가지론적 개념의 범주를 넘지 못하는 사회의 인식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에, 질책보다는 불쌍히 여김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의 은혜적 사모함이 바른 자리매김으로 세상에 빛을 비출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마음을 두어야함이 옳다고 함을 인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목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시려고 할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 나가는데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따르게 되어지고 이와 같이해서 벧엘에 가고 또 여리고까지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벧엘과 여리고에서는 선지생도들의 말과 엘리사의 말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라는 말과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야가 요단으로 가는데, 엘리사가 따르는 모습을 첫 번째 본문의 형식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요단의 선지생도들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고 그들에 대한 엘리사의 답변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가에 이 두 사람이 서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함에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엘리야 자신에게는 어려운 것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취하시는 것을 보면 이루어질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증인의 전인격적인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또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적 흐름에서 주목하면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의 고백이 있게하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로 인해서 두려워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주의 말씀에 새 힘을 얻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아합왕의 아들 아하시아가 난관에서 떨어져 병이 나서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함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안계셔서 그들에게 묻는가 하는 반문과 왕이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전에 굴 속에 숨었던 엘리야는 그때와는 달리 산의 공제선을 의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대한 시비를 가림에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었습니다. 즉 아하시아왕이 디셉사람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50부장과 그 수하들을 세차례 보내게되는데 두번까지는 모두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죽였고, 세번째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하시아왕에게 가라고 말씀하심에 따라 가서 그 면전에서 예언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올리시고자 할 때에 엘리야와 그를 따르고 있는 엘리사 이 두 사람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전인격적인 그들의 증거를 주목해 봅니다.
엘리야 그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my God is Jehovah" or "Yah(u) is God" )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그 이름이 그들의 존재적 삶의 전인격적 증거임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 등장하는 가운데 좋은 이름의 악한 자의 모습도 있지만 그들의 모습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임의적 개념에서의 그러한 이름으로서의 치장적개념으로 일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중심은 전자의 입장으로서 신실한 이름의 합당한 종들로서의 인격적 삶의 증거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God is salvation)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상관성을 추종적 동행의 개념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머물라고 함에 대한 것으로서의 그 의식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성을 나타내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자리매김되도록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 임의적 개념으로서의 구원을 정의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한정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서의 실재적 개념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 엘리사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마음에 두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흐려놓기 위해서 임의적인 신을 말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를 허구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정직하지 못한 이성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기만적 개념으로 죄를 범하는 모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이슬람에서의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서의 표기 '하나님'과 동일하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링크되는 글 각주 1번참고) 한국에서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슬람을 말하는 것인지를 재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중심의 신앙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필요성에서 비로소 언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하심의 정당함을 기억할 때에 예정되어진 사실로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셈의 장막에 머물게 되는 것(창 9:27)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의 기본이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전인격적인 노력과 방향과 구함의 실제적 연속성을 기반으로한, 증거를 읽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벳의 창대함이라고 함에서 그 열매적인 풍부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된, 속된 표현으로 짝퉁, 즉 모조물이 있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 중심을 흐려놓게 되는 시대적 정황적 악함이 있게 될 것을 의식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서 그 말씀이 오늘날 시대적 인식의 정체성을 판단하고 있으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의 시대적 정신의 발현이라고하는 그러한 악함의 모습이 있을 때에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엘리야의 전인격적 신앙이 그 신앙의 그 구원의 열매의 실재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것으로서 선택한 미련한 구원 전도는 세상의 허무개그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것으로서 세상의 감당하지 못하는 핑계치 못하는 복음의 영적 감동과 구원의 실제를 우리의 삶 속에 담아내게되며 증거하게 된다고 하심을 그 증거의 실제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론적 사실의 정당성은 상대적 개념의 사실 시비를 바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형태로서 절대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의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또는 한 가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앞으로 되어질 일 즉 하나님께서 엘리사 위로 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려고 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적 증거일 때에 그러면 엘리야는 그 가는 그 특정 지역에 머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의식의 차이이면서도 반목이냐 아니면 더 풍성한 주의 뜻하심으로서의 그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에 머문다는 개념과 함께 실제적 의미부여와 사실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명들을 주목해 볼 때에 '길갈'(a wheel, rolling)이라는 이름의 지명은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다'(수 5:9)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의 법괘를 맨 제사장들의 발길이 그 요단강에 닿을 때에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의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쌓았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의 종 애굽의 즉 함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함의 신앙고백적 중심을 실제로하는 성례전적인 언약적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일성수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그 삶의 모습을 길갈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머물러라고 하였던 것, 즉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함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뜻하심을 증거하였고, 엘리사가 그것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그로 인해 믿지 않고 단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배당에만 나온다고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사의 순종하지 않으면서 증거한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와서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며 감정적 동요로서 자기를 기만하고 자위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는 것이요.. 앞서 자존의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그 믿는 자로서 마땅히 그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구별된 장소 벧엘에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엘리야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전혀 말하지 않고 신없는 종교 또는 아무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기만적 행위의 사실과 기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에는 구원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체험한 또는 그것에 실족한 자들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 등떠밀린 신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개그일 뿐이요 비소의 씹힐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 '우리 성도들이 씹히지 않도록 하시며'(시 124:6)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고 된다는 것을 믿고 기억하며 증거할 때에 그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어지는 갑절의 영적 감동하심의 큰 권세는 주의 몸된 교회에 있게 되며 또한 그 시기적 개념이 아니라 본래적 개념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단 허무개그 뿐이겠습니까..세상에 내놓으라 하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자들의 지성과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야말로 차원 개그의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의 불가지적 개념과 그러한 가운데서 '유희'를 말하는 '해체'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허울좋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써의 '신은 죽었다'는 계보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구교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잘못한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에 대한 것이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추종적 동행의 두 증인이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관심도 없고 임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신이 죽었다고 하고 ...에휴.. 그만한 허무개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려..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도록 엘리야와 엘리사를 두 증인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으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음을 기억하고 참으로 우리의 삶의 상대적이면서도 진실로 받을수 있는 구원의 사실과 증거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에 따른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제론적 사실의 정당성은 상대적 개념의 사실 시비를 바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형태로서 절대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의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가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행한 행보의 여로에서 읽을 수 있는 증거는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또는 한 가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엘리사는 엘리야의 앞으로 되어질 일 즉 하나님께서 엘리사 위로 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따르려고 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적 증거일 때에 그러면 엘리야는 그 가는 그 특정 지역에 머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의식의 차이이면서도 반목이냐 아니면 더 풍성한 주의 뜻하심으로서의 그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역에 머문다는 개념과 함께 실제적 의미부여와 사실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도록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명들을 주목해 볼 때에 '길갈'(a wheel, rolling)이라는 이름의 지명은 '애굽의 수치가 물러간다'(수 5:9)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지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의 법괘를 맨 제사장들의 발길이 그 요단강에 닿을 때에 물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일 건널 수 있게 되었고 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그 강의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쌓았고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던 곳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의 종 애굽의 즉 함의 저주에서 벗어났다고 함의 신앙고백적 중심을 실제로하는 성례전적인 언약적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주일성수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그 삶의 모습을 길갈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머물러라고 하였던 것, 즉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함의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뜻하심을 증거하였고, 엘리사가 그것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의식을 가지지 않고, 그로 인해 믿지 않고 단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예배당에만 나온다고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엘리사의 순종하지 않으면서 증거한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서도, 예배당에 나와서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며 감정적 동요로서 자기를 기만하고 자위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는 것이요.. 앞서 자존의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그 믿는 자로서 마땅히 그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구별된 장소 벧엘에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엘리야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전혀 말하지 않고 신없는 종교 또는 아무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기만적 행위의 사실과 기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에는 구원의 사실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체험한 또는 그것에 실족한 자들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 등떠밀린 신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개그일 뿐이요 비소의 씹힐 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 '우리 성도들이 씹히지 않도록 하시며'(시 124:6)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를 말하고 된다는 것을 믿고 기억하며 증거할 때에 그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어지는 갑절의 영적 감동하심의 큰 권세는 주의 몸된 교회에 있게 되며 또한 그 시기적 개념이 아니라 본래적 개념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비단 허무개그 뿐이겠습니까..세상에 내놓으라 하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자들의 지성과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야말로 차원 개그의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의 불가지적 개념과 그러한 가운데서 '유희'를 말하는 '해체'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허울좋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써의 '신은 죽었다'는 계보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구교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잘못한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에 대한 것이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추종적 동행의 두 증인이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관심도 없고 임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신이 죽었다고 하고 ...에휴.. 그만한 허무개그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려..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도록 엘리야와 엘리사를 두 증인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으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음을 기억하고 참으로 우리의 삶의 상대적이면서도 진실로 받을수 있는 구원의 사실과 증거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정당함에 따른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두면서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하시는 성도들로서 주 앞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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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