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11, 2007

손 마른 인생

2007년 12월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 6:1-11
네 손을 내밀라

어떤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그 손으로 집어주며 먹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받아 먹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여지는 있어서 그 받는 사람의 절실한 입장이라고 할 때에 받아 먹을 수도 있고 또 굴욕적 강요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 음식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적 여지를 감안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신앙적 실제의식에 따른 판단을 마음에 두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상대적 절대'라는 획일적 고립적 성립되지 않는 그 누가 말했던 것과 같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성은 자존의 자기 정당함에 따라서 구별되어진 상대적면서도 절대적인 실제의식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절대자 하나님 자신의 받으심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심을 오늘 본문에서도 주목하며 마음에 두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목해 볼 때에, '손'이라는 표현이 증거로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과 그와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서 증거하는 내용의 기술적(記述的) 전반적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적 증거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손을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에 따라 어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적 위반을 말하면서 시비(是非)를 말하려고 함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임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아 송사할 빙거를 찾고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하는 것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심에 따라 그 손이 회복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송사할 빙거를 찾던 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의논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동일본문과 문맥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되어진 복음서 기자의 의식이 또한 주의 말씀에 따른 증거를 위해 특별 영적인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의 증거되어지는 해석적 당위성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출애굽기 4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의 두 안식일이 비교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 성례적 기호적 표적으로서의 손을 회복하게 하신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표지로서의 성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행하신 성찬이 그 전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증거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시적 표적적인 거룩한 예표로서 읽을 수 있는 성례로서 각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에 고쳐진 '손'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심에 있어서

쉼이라는 것으로서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예수님 안에서 그 실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죽으심과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을 나타내는 부활하신 날을 마음에 두는 것이, 시간적 개념의 전통적 안식의 규정적 입장보다 바른 안식의 실제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안식으로 마음에 두는 것은 성경대로 한다는 미명아래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의 의도하심과 섭리는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거짓을 범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읽지 않고 그가 쓴 책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과 같이, 그것을 주장하기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우기는 것이요 잘못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기의 실존이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분이심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정당함을 절대적 자기 속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 자신이 그와 같은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셨고 그 안식에서 주권적 정당함을 취하심에 따라 상대적 관점의 시비라는 것에 실존적 정당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주의 제자들의 인식과 행보라는 것에 있어서의 판단도 주의 뜻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어질 수 있는 구별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경우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첫 안식일에 있는 주의 답변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제자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은 바로 '세상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나는 지팡이가 뱀과 같이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읽게 하시는 것이며, 또한 무슨 상대적인 말들이라고 하여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무슨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시려는 것으로 연결되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손을 회복시켜주심에 대하여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던 일로서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손 마르다는 개념이 위생적 개념으로 비로소 말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더럽다는 개념으로 바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또한 그 정상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본다고 할 때에 몸의 질병적 개념으로만 볼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주의 뜻하심을 따르는 정당함에서 판단되는 행위들로서 정체성을 잃은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개념이 이입되어짐의 당위성을 설정함의 정당함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가인은 상대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아벨보다 가인이 더 수고하고 노력해서 밭의 소산들을 드렸다고 하는 측면에서 더 받음직하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를 예표함으로서의 성례전적인 양을 드림의 실제적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보와 그려한 행함의 손은 하나님께 드림과 섬김으로서의 정체성의 실존을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그 의로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청함받은 자들의 손들이라고 하는 것은 택함받은 자로서의 손길과 다른 것으로서 마른 손에 비교되어지는 진실로 고침을 받아야 할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른 손이라고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성례전적 증거로 받을 수 있음의 타당성과 일관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습임을 받게 될 때에 본문과 출애굽기 4장에 나타난 두 번째 기적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출 4:6~7)

'나와 같은 선지자가 있을 것'(신 18:15; 행 7:37)을 예언했던 모세의 증거를 마음에 둘 때에 예수께서 모세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체험을 자기의 몸된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자존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의 증거와 같이 예언되어진 메시아 구주이심에 대한 것과 구약이 증거하는바 예수님을 믿음이 옳으며 믿게될 것을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손을 고쳐주심은 이제 주님 안에서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섬기고 주의 택한 백성을 이끌어낼 모세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로서 구별되어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상대적인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황적 실존일진대 절대와 상관하겠다는 것 절대에 비교되어진 가운데서 당위성을 비로소 얻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고 할 때에 과연 인생의 손은 마른 손입니다.

즉 속된 표현이지만,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같이 아무리 고귀한 척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 앞에서 무엇인가 받을 만한 행보를 나타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시는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적 기준에서 마련한 그 방법, 절대의 정당함을 얻는 상대적인 것으로서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게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의 모자란 모습에서도 실제적인 하나님의 받으신 바를 행할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적 권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손 인생..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나의 중심과 삶에 기준으로 받아들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다윗과 같은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마른손으로서의 인생의 모습이 치유함을 받아,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받으신 바되는 그 섬김으로서 잘했다 칭찬함을 받게 되는 자리에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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