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7월 10, 2007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유와 증거

2007년 7월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왕상 8:12-26
성전봉헌의 축복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 따라 그 누리는 문화라고 하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일관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호화로운 주택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착민에게 있어서는 그와 달리 좀더 안정적인 측면에서 의식주를 생각할 때에 거할 곳으로서 그 주택의 의미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현대의 재태크적인 측면으로 의미가 변화되어진 모습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재태크라는 개념이 어떤 부동산개념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적 개념에도 변형되어진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대형 사업장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상식적 입장에서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회의 예배당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경우와 같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해석되어진다는 것과 납득당위성을 비로소 갖는다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즉 합당한 예배당에 대한 인식이 아니면서도 사람들의 인식의 연약함을 인하여서 교회의 예배당의 건물적 의미를 마음에 두는 그러한 신학적 입장의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교회 성장학에 있어서의 그러한 측면으로 접근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인식의 연약함을 이해한다는 것과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음에 대한 현실태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복음전도의 준거점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은 그러한 준거점적 실재에 대하여서 비로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상대적 현실성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선히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또한 선히 받을 수 있기를 마음에 둘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비로소 우리 성도들이 성전으로서의 예배당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 증거적 입장을 마음에 둘 때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에서 그 중심을 배워 익히며 증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주께서 계실 영원히 계실 처소'로서의 성전을 선포하고 이 성전은 다윗이 건축하고자 했으나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지을 것이라고 하심의 정당함에 따라서 그 뜻하심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라는 중심으로서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는데 하나님뜻대로 이루게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한 가운데서 그 약속하심이 그 백성들에게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적인 측면에서의 솔로몬 성전봉축이라는 개념이 계시적 실제적인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주목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솔로몬 성전 건축과 봉헌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솔로몬성전 건축을 마치고 그 성전건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증거와 그러한 합당한 봉헌식을 가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의지하여서 그러한 신실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져 주의 말씀에 따른 정당함에 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언약하심이 백성들에게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신실하심의 약속하심을 나타내심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임의적 강요에 따른 간구가 아닌 합당한 종들의 증거와 섬김과 고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정당함에 따른 성전봉헌을 말할 때에 다윗이 건축하지 않고 자신이 짓도록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정당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상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이 아니면 상식적으로 누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권세를 합당하게 취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볼 때에 자존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시고 솔로몬을 통한 건축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상식적인 측면의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그 뜻하심을 살펴서 그 말씀하심의 증거를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천사들의 증거를 통해서 읽게되는 것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증거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함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에 따라 구속받은 자들과 그의 지으신 백성들에게 있게되어지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주어지는 차이가 있는 평화이면서도 실제적인 그들의 평화가 있게되어짐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기뻐하심이라는 것은 '(기쁨과 의지와 선택Will, Choice)'을 의미하는 말인 유도키아스(ευδοκιας )라는 말입니다. 주의 주권적 기뻐하심과 그 의도하심에 따른 택하심에, 구약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솔로몬을 선택하신 것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의 증거적 복됨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쁨 중에 평화는 살롬적 성전의 성례전적인 증거의 실제적인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모두 다른 지역의 다른 성의 이름이면서도 동일한 '살롬'이라는 기원적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즉 '살롬' '평안' 그 평안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성이며, 평화로서 주어진 성전으로서의 솔로몬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을 때에 이 모든 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의 실존적 자신을 주의 소유된 자로서 주님께 드리게되는 헌신의 실재를 예표하는 성례전적인 성소였던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솔로몬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도 있지만 성례전적인 개념이 주의 정하심의 뜻하심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제 그 계시의 시간이 지난 가운데서는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권한이 비로소 없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고난과 고통속에서 무너짐을 주목하여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지상의 성전적 개념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도록하심의 의미와 실제를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이제 '참 성전이신 예수님'(요 2:21)이 오셨고 다시 오실 언약이 실행되고 있는 가운데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는 계시의 시대가 이미 완성되어진 가운데서 성례전적인 개념에서 성소라는 개념을 비로소 취하는 성전의 개념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배처소를 드린다는 측면에서 한정되어지면서도 실제적인 성전의 의미를 마음에 둠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받으신 바되었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서 받으셨음에 대하여서 우리 자신을 드림이라는 헌신에서의 성전봉헌의 실제적인 모습과 증거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εν Χριστος)을 예수님 몸 안에 존재적 흡수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세를 지나 존재의 유출적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당위성을 비로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롬 5:1; 갈 3:11)에서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은 실존적 존재로서 주 앞에 거하게 되는 것'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날의 예배당은 어떤 증거적 실제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성전봉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의 실제적 헌신을 의미함인데 예배당과의 상관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서 가장 아름답고 합당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창세기28장의 말씀입니다. 즉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노숙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을 꾸게 되어 그곳에서 돌배게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함의 '벧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한 구별적 장소에서 그는 아버지집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면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겠으며 자존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서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28장 10~22절 )

우리 성도들도 이미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롬 5:1), 앞으로 구원받아야할 존재들이 아니라 이미 실제적으로 구원받은 자들로서 현실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한 예배처소를 구별하고 그곳에 나와서 야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가운데서 십분의 일과 헌물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나의 하나님이심을, 주의 구원하심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예배를 비롯한 모든 예배의 기본이며 예배당 출석의 실제적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간접인격적 의미부여로서의 인터넷이나 예배의 인도자의 직접인격적 인도를 배제한 어떤 화상적 예배는 그 의미를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측면에서 도우미로서의 실제적 의미를 가질 뿐 교회 예배당 출석을 통한 신앙고백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인격적 예배라고 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요 주의 소유된 자들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과 증거로서 한 처소를 주의 말씀에 입각한 교회의 질서에 따라 구별하여 그곳에 출석하며 예배하여 자신을 드림의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솔로몬 성전봉헌식은 예수그리스도의 참성전이심을 근거로한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자들로서,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장소를 구별하여서 예배하며 주의 말씀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삶속에 이루이지기를 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본분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세상의 복음의 접촉점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구별되어질 수 있으나, 이러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는 그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하심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함에 있어서는 그 구하는 자의 신실함이 주의 판단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참되게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바르게 주일성수 및 예배생활을 통해서 성전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롬 5:1) 주의 말씀과 같이 화평케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함을 받으며(마 5:9) 그러한 면류관으로 세세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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