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8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8-31
십자가의 도
For the word of the cross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책임지게 될 때에 또는 본의가 아니라도 감당하려고 할 때에 자신이 대표자로써 책임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에 비교하여서 그런 표현으로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짐을 대신 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 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좀 분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것에 즉 도덕적 부담이라는 것의 상징으로써의 십자가라는 잘못된 ‘십자가의 도’를 생활 속에서 인정하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도’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함과 지혜 있는 자 이 세상의 변사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말하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부르심을 보라고 하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자체로서의 그 고린도교회가 주의 구원하심의 섭리로서 하나님 앞에 자랑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떤 것인가 그것과 지혜와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상의 변사가 그 존재적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지혜없다 하심과 하나님의 미련한 것으로서의 지혜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고 마는 가운데 현상적인 이해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으니, 성도도 고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도덕관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전혀 부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의 연속성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적 판단이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는 그러한 도덕적 신앙윤리적 개념의 모습으로만 이해함에 있어서는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써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상대적인 존재의 부정이라는 개념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받는다면 자신의 자존의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으로서 다시 살아나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로서 그가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실 때에 이미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정당함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존재로서의 재가를 받은 성도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옷을 입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적 재가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왕적 권세와 같은 것으로써 그것은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주 앞에서 행할 때에는 그 재가를 받은 것으로써 정당할 때에는 그 증거하는 것이 미련하다고 하여도 진정한 사실로서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증거를 할 때에 상대적 입장에서 편협한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능력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구원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실재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그 절대 보편적 지원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편협해 보인다는 것으로 성도들을 미련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만적인 어리석음으로 자신들을 자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게 취하셔서 상대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고 능력의 재가가 있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식보편적 생각에서 지원되어지는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체적으로 정당함을 스스로 취한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이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변사들은 그 말의 임의적 정당함 상대적인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를 정당한 지혜를 취한 세상의 변사는 없다고 할 때에 그들은 궤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의 당위성을 신이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는 신의 속성으로 상대적인 범주에서 비로소 존재하지 않으며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표적이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함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지혜의 기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자기계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과 같은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을 책임론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계시로서의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그 한마음을 품으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는,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먼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란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한 ‘주의 십자가에 도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차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우리의 믿음들도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서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으로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는 회의적 측면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여도 합당한 증거가 되며, 그러한 증거를 통해 합당하게 주의 뜻하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십자가에 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되지만 그것이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만 하는 것을 체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상대적인 측면의 완전성을 지나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서 비교 우위적 개념보다도 진정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함보다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받아주며 오래 참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미련해 보이는 상대적인 우리의 증거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주의 구원을 진정한 사실로써 합당하게 믿으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고전1:18-31
십자가의 도
For the word of the cross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책임지게 될 때에 또는 본의가 아니라도 감당하려고 할 때에 자신이 대표자로써 책임진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에 비교하여서 그런 표현으로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짐을 대신 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 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좀 분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한 것에 즉 도덕적 부담이라는 것의 상징으로써의 십자가라는 잘못된 ‘십자가의 도’를 생활 속에서 인정하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도’는 무엇일까 하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8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함과 지혜 있는 자 이 세상의 변사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말하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6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부르심을 보라고 하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자체로서의 그 고린도교회가 주의 구원하심의 섭리로서 하나님 앞에 자랑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떤 것인가 그것과 지혜와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상의 변사가 그 존재적 입장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써 지혜없다 하심과 하나님의 미련한 것으로서의 지혜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고 마는 가운데 현상적인 이해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으니, 성도도 고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도덕관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전혀 부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의 연속성에서 구별되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적 판단이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는 그러한 도덕적 신앙윤리적 개념의 모습으로만 이해함에 있어서는 본질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써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상대적인 존재의 부정이라는 개념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받는다면 자신의 자존의 하나님 성부하나님 자신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으로서 다시 살아나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성부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로서 그가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을 다 이루셨다고 하실 때에 이미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정당함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존재로서의 재가를 받은 성도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옷을 입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적 재가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왕적 권세와 같은 것으로써 그것은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주 앞에서 행할 때에는 그 재가를 받은 것으로써 정당할 때에는 그 증거하는 것이 미련하다고 하여도 진정한 사실로서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실의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증거를 할 때에 상대적 입장에서 편협한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능력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구원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실재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그 절대 보편적 지원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편협해 보인다는 것으로 성도들을 미련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만적인 어리석음으로 자신들을 자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게 취하셔서 상대적으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신다고 하여도 절대의 재가가 있고 능력의 재가가 있는 것을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식보편적 생각에서 지원되어지는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체적으로 정당함을 스스로 취한다고 하여도 그 정당함은 역시 상대적이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로서의 변사들은 그 말의 임의적 정당함 상대적인 것으로써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를 정당한 지혜를 취한 세상의 변사는 없다고 할 때에 그들은 궤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도 납득의 당위성을 신이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는 신의 속성으로 상대적인 범주에서 비로소 존재하지 않으며 판단할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성부하나님이심을 믿는 가운데서 표적이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함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지혜의 기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주의 자기계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과 같은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을 책임론이라는 것으로 비로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계시로서의 예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다는 그 한마음을 품으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와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는, 믿음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먼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란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러한 ‘주의 십자가에 도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의 분량의 차이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차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우리의 믿음들도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서 재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적 입장으로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는 회의적 측면을 가지고 말한다고 하여도 합당한 증거가 되며, 그러한 증거를 통해 합당하게 주의 뜻하심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의 ‘십자가에 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아들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능력을 담아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되지만 그것이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자리에 나가야만 하는 것을 체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상대적인 측면의 완전성을 지나야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믿음의 분량의 차이에서 비교 우위적 개념보다도 진정한 사실이 비로소 있는 것으로 생각함보다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받아주며 오래 참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미련해 보이는 상대적인 우리의 증거에 주의 뜻하심을 담아내어 주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주의 구원을 진정한 사실로써 합당하게 믿으며 증거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