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0일 소망교회 새벽예배설교
욘4:1-11
박넝쿨 교훈
얼마 전에 세들어 사는 집 주인 할머니께서 호박죽을 쒀서 먹어보라고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전에 청년 때에, 학교 다닐 때에 한 번씩 식사겸 먹어본 기억이 나서 참 감사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박’이라는 것은 식용의 호박(珀)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호리병박’ 또는 ‘조롱박’과 같은 박(a gourd, a plant)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박넝쿨로 교훈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서 여호와께 기도함과 주께서 그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니느웨성이 무너지리라는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알아봤다는 식의 언급과 생명을 취하시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요나 자신에게 나음이라고 강변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요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냄에 대한 합당함을 물으심에 요나는 답변하지 않고 그 성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성에서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았음에, 하나님께서 그 초막위에 박넝쿨을 준비해주셔서 그늘지게 하셔서 요나가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함과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씹게 하여 마르게 하시니 요나는 또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박넝쿨에 비교하시면서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질문을 하시며 배양도 하지 않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요나 자신이 아꼈거든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있는데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나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요나의 답변은 요나서 본문에서는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회개의 열매로서 어떤 것이어야 마땅한지는 이미 요나도 알게 하심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나타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아가서 2: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에서 찾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박넝쿨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요나서 3장에 나타나고 있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의 열매라고 함을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 성 왕과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욘 3:5, 그들이 믿었다는 말, ‘와야아미누’로써 아만, 아멘의 뜻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인식의 대표적인 입장으로써의 그 왕의 인식을 표현한 것을 보면 9절에서는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9)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더욱 마지막에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박넝쿨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개연적인 믿음으로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고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오래참으시고 또한 주의 뜻하신 시기에 회개시키실 수도 있으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는데 요나는 주의 뜻하심보다도 그 말씀하신 액면적 판단하심의 신실하심을 내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에 있어서의 주권적 판단을 요나는 그의 자신의 사역적 판단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합당치 못한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표현을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액면적 판단으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에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요나에게 주의 몸된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고 그 요나의 마땅한 신앙고백의 자리에 서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이미 요나가 알게 하심을 뜻하셨다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4~17)
솔로몬이 그의 신부 술람미 여인을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부르심과 같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와 같이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둘기야’라고 할 대에는 ‘요나티’라는 말로써, ‘요나’라는 말에 일인칭 소유격을 나타내는 ‘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서 4장에 나타나는 선지자 ‘요나’와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동일한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요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말씀과 대하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요나티’ 즉 ‘나의 비둘기’라는 말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나의’라는 말의 소유격적인 측면은 주권적 정당함을 주장하시는 분으로써 비둘기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요나)로서 표현하며 참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요나서에서는, 그러한 정당함을 주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박이 하룻밤 사이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 표현함에 있어서는 그리고 아가서에서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인생의 종말적 시간을 의미하며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나타내심으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는,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요나서에서는, 요나서 전반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가서 ‘베데르의 산’이라는 것은 ‘부분’,‘조각’이라는 뜻을 가진 산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요나서에서는 주관적 자기 진리, 즉 ‘나의 진리’(my truth)라는 요나의 중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욘 1:1)에서 그 ‘아밋대’라는 말이 바로 ‘나의 진리’(my truth)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 큰성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해봐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습게만 여겨질 것이라는 점에서 요나는 도망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진실로 복음의 사실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에 자신에게 주신 증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심판을 받지 않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니까 요나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아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정당함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요나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잘못되게 굳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제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합당한데, 심판하심이 현상적인 상대적 충족성의 판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나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요나는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합리성이 충분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분별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주시기 원하며 오래 참고 있으시고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주 앞에 순종하기를 따라가기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로 표현되어지고 있고 본문에서는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반복적인 말씀과 박넝쿨의 비유와 그 니느웨성에 대한 주의 뜻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결혼하여 신혼 때에 참으로 서로 아름답게 여기지만, 세월의 때가 묻게 되고 생활에 따른 고통이라고 함을 서로 감수할 때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배필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라고 함을 볼 때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어여쁜 당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서로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어여쁘게 보시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어여쁘게 보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마음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박넝쿨 비유로 가르쳐주시는 주의 교훈을 받으며, 여러 말씀하심의 뜻을 분별하고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의 말씀하심을 주의 뜻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의 아집과 편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종으로서의 판단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가운데, 형제를 받으며 주의 몸된 교회를 받으며 그들을 주장하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않는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과 동행하시는 귀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어여쁜 당신’(아 2:13)으로서의 요나와 같은 시대의 표적으로서의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욘4:1-11
박넝쿨 교훈
얼마 전에 세들어 사는 집 주인 할머니께서 호박죽을 쒀서 먹어보라고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전에 청년 때에, 학교 다닐 때에 한 번씩 식사겸 먹어본 기억이 나서 참 감사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박’이라는 것은 식용의 호박(珀)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호리병박’ 또는 ‘조롱박’과 같은 박(a gourd, a plant)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박넝쿨로 교훈하시고 있는데 그러한 교훈과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서 여호와께 기도함과 주께서 그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 즉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니느웨성이 무너지리라는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으로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알아봤다는 식의 언급과 생명을 취하시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요나 자신에게 나음이라고 강변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요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말씀하여 주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성냄에 대한 합당함을 물으심에 요나는 답변하지 않고 그 성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성에서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았음에, 하나님께서 그 초막위에 박넝쿨을 준비해주셔서 그늘지게 하셔서 요나가 그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함과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씹게 하여 마르게 하시니 요나는 또 스스로 죽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박넝쿨에 비교하시면서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질문을 하시며 배양도 하지 않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요나 자신이 아꼈거든 니느웨 성에 좌우를 분별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있는데 그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냐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나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요나의 답변은 요나서 본문에서는 기록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회개의 열매로서 어떤 것이어야 마땅한지는 이미 요나도 알게 하심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떻게 나타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아가서 2:14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과 비교되어지는 것에서 찾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박넝쿨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요나서 3장에 나타나고 있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의 열매라고 함을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니느웨 성 왕과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멘’으로 믿었던 것입니다.(욘 3:5, 그들이 믿었다는 말, ‘와야아미누’로써 아만, 아멘의 뜻임)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인식의 대표적인 입장으로써의 그 왕의 인식을 표현한 것을 보면 9절에서는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9)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받으신 바가 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먹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더욱 마지막에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박넝쿨로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개연적인 믿음으로 복음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지 못하고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 오래참으시고 또한 주의 뜻하신 시기에 회개시키실 수도 있으시며 그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는데 요나는 주의 뜻하심보다도 그 말씀하신 액면적 판단하심의 신실하심을 내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에 있어서의 주권적 판단을 요나는 그의 자신의 사역적 판단에서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합당치 못한 판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표현을 귀하게 여기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액면적 판단으로 주의 뜻하심이라고 함에서부터 정당함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요나에게 주의 몸된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고 그 요나의 마땅한 신앙고백의 자리에 서도록 하심의 뜻하심을 이미 요나가 알게 하심을 뜻하셨다는 것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4~17)
솔로몬이 그의 신부 술람미 여인을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부르심과 같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와 같이 비교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비둘기야’라고 할 대에는 ‘요나티’라는 말로써, ‘요나’라는 말에 일인칭 소유격을 나타내는 ‘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서 4장에 나타나는 선지자 ‘요나’와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동일한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요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요나에게 하신 말씀과 대하심이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요나티’ 즉 ‘나의 비둘기’라는 말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나의’라는 말의 소유격적인 측면은 주권적 정당함을 주장하시는 분으로써 비둘기가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함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요나)로서 표현하며 참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요나서에서는, 그러한 정당함을 주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박이 하룻밤 사이에 있게 되어지는 것’으로 표현함에 있어서는 그리고 아가서에서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인생의 종말적 시간을 의미하며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나타내심으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교회의 시대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는,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요나서에서는, 요나서 전반적인 측면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가서 ‘베데르의 산’이라는 것은 ‘부분’,‘조각’이라는 뜻을 가진 산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아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요나서에서는 주관적 자기 진리, 즉 ‘나의 진리’(my truth)라는 요나의 중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욘 1:1)에서 그 ‘아밋대’라는 말이 바로 ‘나의 진리’(my truth)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주관적인 것으로 큰성 니느웨에 가서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해봐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습게만 여겨질 것이라는 점에서 요나는 도망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음이라는 진실로 복음의 사실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에 자신에게 주신 증거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심판을 받지 않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니까 요나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아봤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심의 정당함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요나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잘못되게 굳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실제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아야 합당한데, 심판하심이 현상적인 상대적 충족성의 판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나가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요나는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합리성이 충분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분별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고쳐주시기 원하며 오래 참고 있으시고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주 앞에 순종하기를 따라가기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로 표현되어지고 있고 본문에서는 요나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는 반복적인 말씀과 박넝쿨의 비유와 그 니느웨성에 대한 주의 뜻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결혼하여 신혼 때에 참으로 서로 아름답게 여기지만, 세월의 때가 묻게 되고 생활에 따른 고통이라고 함을 서로 감수할 때에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어지는 경향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배필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라고 함을 볼 때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어여쁜 당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서로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어여쁘게 보시는 가운데서 우리 성도들은 주의 몸된 교회를 어여쁘게 보는 것이 진정한 사실임을 마음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박넝쿨 비유로 가르쳐주시는 주의 교훈을 받으며, 여러 말씀하심의 뜻을 분별하고 그 명령을 따를 때에 주의 말씀하심을 주의 뜻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분별하는 가운데, 우리의 아집과 편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종으로서의 판단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가운데, 형제를 받으며 주의 몸된 교회를 받으며 그들을 주장하시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않는 가운데서, 참으로 주님과 동행하시는 귀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어여쁜 당신’(아 2:13)으로서의 요나와 같은 시대의 표적으로서의 성도님들과 교회가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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