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15, 2005

부활이 없다 하느냐

2005년 9월 1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1-34
부활이 없다 하느냐

‘모든 것은 세월이 말해준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라는 말과 같은 세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며 우리의 곁을 지나는데, 그것의 보편적인 인식은 인정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고통의 시절도 잊고 즐거움의 시간도 망각이라는 바다에 버리게 되는 것이며 세월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무상함을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었던 그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후대의 사람의 기억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억한 바가 없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사실이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실증적인 개념에서 다소 유익을 허구라고 하여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산 증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죽고 몇몇정도 살아 있다고 할 때에 그 사실을 현대의 요구에 따라서 재해석되어지고 현대에 맞도록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33, 34절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속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은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믿을 수 있는 자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란이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열정적인 측면에서 실증적인 실리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합리적인 이유를 따라서 판단하고 그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도외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라고 하는 것의 가장 큰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부활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참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여러 파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가운데서 마치 사무엘과는 다른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성찬의 예물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그러한 악한 모습 ‘불량배의 모습’(삼상 2:12)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엘리의 아들의 모습(삼상 2:12)과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서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도 패역의 쓴 뿌리는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가운데서 쓴 가라지의 열매가 되어 교회의 합리성만 추구하는 가운데서 주 앞에서의 정당함의 사실로서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의 결론적인 부분에 와서 바로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3절과 34절에 그러한 합리성을 비로소 의지하는 자들의 부활의 사실의 부인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하심과 그들이 악한 동무임을 지적하시면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써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들을 주목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함과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 증인들이 있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실증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역사성을 말할 때에 역사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실증적인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만을 비로소 의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본문에서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증거의 말씀은 주의 평화 언약, 즉 예정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어진 사실들입니다.(엡 1:4,5)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하심(요 17:21~24)을 품었던 자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2:16)

창세 전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 사실로 시간의 판단을 받는 세월의 흐름의 판단에서 생성과 쇠퇴와 부인되어지는 사실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표시이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는 지혜로운 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상대적 합리성의 상대적 완전성과 충족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있는 입장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비판 가능한 입장일뿐 아직 정당함의 재고를 하지 않는 질문이 되어질 것이며 그러한 지혜의 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그에 대한 묘사를 상대적으로 표현하실 때에 그것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연속성은 상대적인 불연속성이라는 말로 비판의 형태를 띠면서도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은 바로 그 합리성의 존재를 비합리적이면서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전이라는 말이 비합리적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서의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의 범주 전에 있다는 표현이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실증적인 현실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 상대적으로 세월이 지난 후에 쇠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하면서도 그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즉 세월의 범주를 벗어나는 세월의 판단을 벗어나는 진리로서 세월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의 절대자가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역사속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의 형태로 진리로서 말씀하심에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 세월 속에 쇠퇴 소멸되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라는, 존재를 모두 휩쓸고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그러한 판단 속에서도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소멸해버리는 가운데서, 인식되는 정황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판단하여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한 홍수가 있어도 그 사실을 붙들게 되는 자들은 세월의 판단과 정죄로 인한 홍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에 속지 않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 '다시 주님 안에서 살아남'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는 영원한 실제의 사실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말은 합리성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존립 정당함은 임의적이라는 사실에서 그 부인의 사실은 세월이 판단 받는 날, 창조된 시간이 판단 받는 날에 같이 판단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에 판단을 받는 자들의 모습을 오히려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적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말자체도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그것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기본은 그 공식적인 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를 역사속에 사실로 나타내심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없다는 그러한 말, 정당함이 없는 말에 속지 않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깨어 있어서 선한 행실을 하며 죄를 짓지 않고 주 앞에서 의를 행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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