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3:1-9
주 손으로 덮으시네
자신의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적고 그것을 관리하고 하는 것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기를 쓰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손으로 감추게 되고 또 자기만 보고자 하는 책이나 정보등도 손으로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아닌 기성세대에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손으로라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기쁨을 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택하신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고 기뻐하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주의 권능의 손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덮으시며 보호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사실적인 증거를 근거로 믿음으로 받음을 우리 성도들은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것과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칼로 찌르는 일과 선지자가 예언과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의 종임을 말할 것이고 그들의 팔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목자를 치실 것과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주께서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온 땅에 삼분지 일은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을 것과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일주간에 대한 예언과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호산나 찬송 부르는 자들의 영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같이 그 생애 전체가 공생애적인 것이면서도 고난 일주간에 대한 것으로 다시 한번 전반적인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과 동일하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현실에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가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게 되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맹세의 시대, 그러한 죄로 인해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시대에 함부로 임의적 사실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 그의 가르침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어 생활하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도성 예루살렘으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요 교회의 시대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을 그 낳은 자들이 칼로 찌름과 같이 거짓된 신앙의 정적인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 있는 즉 경건의 모습이 있으나 경건의 실상은 부정하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자녀들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막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인식을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주님오심에 대한 간절함 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러한 진정한 사실을 사모하고 그것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상에게 맹세를 말하는 그러한 것으로 자학한 모습을 한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친구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교적인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과 거짓된 모습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목자를 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 작은 자들 삼분의 일 위에는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기업과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 삼분의 일인 셈족의 언약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드리게 되는 자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아들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주권적 정당함에 따라서 예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오늘 본문에서 삼분의 일이 멸해지는 것은 함의 족속을 제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삼분의 일이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것은 셈족 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족속의 경우는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삼분의 일이라는 축복의 말씀에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삼분의 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의 족속이라고 함은 그 이름이 '셈'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을 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셈족 계통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약의 처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을 기억할 때(마 6:9~13)에 셈족 계통의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생명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작은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하심 안에서 그의 소유된 자들을 손으로 덮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의 깊이와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세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는 오늘날 모두 불가지론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사실을 말씀하심에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에 있어서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임을 믿고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주의 축복하심의 손이 드리워진 자리에 선 자들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골 1:24) 원했던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믿음의 달려갈 길을 잘 달리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면류관을 주께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그 기쁨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슥13:1-9
주 손으로 덮으시네
자신의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적고 그것을 관리하고 하는 것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기를 쓰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손으로 감추게 되고 또 자기만 보고자 하는 책이나 정보등도 손으로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아닌 기성세대에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손으로라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기쁨을 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택하신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고 기뻐하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주의 권능의 손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덮으시며 보호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사실적인 증거를 근거로 믿음으로 받음을 우리 성도들은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것과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칼로 찌르는 일과 선지자가 예언과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의 종임을 말할 것이고 그들의 팔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목자를 치실 것과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주께서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온 땅에 삼분지 일은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을 것과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일주간에 대한 예언과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호산나 찬송 부르는 자들의 영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같이 그 생애 전체가 공생애적인 것이면서도 고난 일주간에 대한 것으로 다시 한번 전반적인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과 동일하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현실에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가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게 되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맹세의 시대, 그러한 죄로 인해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시대에 함부로 임의적 사실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 그의 가르침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어 생활하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도성 예루살렘으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요 교회의 시대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을 그 낳은 자들이 칼로 찌름과 같이 거짓된 신앙의 정적인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 있는 즉 경건의 모습이 있으나 경건의 실상은 부정하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자녀들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막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인식을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주님오심에 대한 간절함 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러한 진정한 사실을 사모하고 그것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상에게 맹세를 말하는 그러한 것으로 자학한 모습을 한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친구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교적인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과 거짓된 모습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목자를 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 작은 자들 삼분의 일 위에는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기업과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 삼분의 일인 셈족의 언약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드리게 되는 자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아들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주권적 정당함에 따라서 예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오늘 본문에서 삼분의 일이 멸해지는 것은 함의 족속을 제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삼분의 일이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것은 셈족 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족속의 경우는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삼분의 일이라는 축복의 말씀에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삼분의 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의 족속이라고 함은 그 이름이 '셈'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을 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셈족 계통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약의 처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을 기억할 때(마 6:9~13)에 셈족 계통의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생명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작은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하심 안에서 그의 소유된 자들을 손으로 덮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의 깊이와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세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는 오늘날 모두 불가지론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사실을 말씀하심에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에 있어서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임을 믿고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주의 축복하심의 손이 드리워진 자리에 선 자들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골 1:24) 원했던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믿음의 달려갈 길을 잘 달리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면류관을 주께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그 기쁨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