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5월 01, 2004

지식 없는 말의 정체

2004년4월30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5:1-16
지식 없는 말의 정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과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의 상황에 따른 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 사람들은 종종 어찌 할 줄 모르게 되어지는 딜레마를 느끼게 되거나 또는 임의적으로 어느 한편을 택하여서 자신의 입장을 취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성경에서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과 지식이 없으므로 이 백성이 망한다는 말씀하심의 해석을 놓고 정도면에서 타협적인 측면의 합리성을 찾게 되어지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진정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임의적으로 행하는, 택하는 지식에 대한 상충적인 입장을 인해 고통되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욥의 자신에 대한 입장정리라고 하는 것을 삶의 경험적 측면에서 합리적으로 변명한 것에 대하여서 엘리후는 욥이 취한 그것이 헛된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또한 지식 없는 말을 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후를 통하여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그 책망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지식 없는 말의 정체는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함을 사모하는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욥이 앞서 언급한 내용들 그 중에서 구체적인 것을 지적한다면 욥기 34장 5절에서는 자신의 의를 하나님이 제하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과 욥기 34장 9절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고 하는 말을 함에 대한 지적들.., 욥의 언급했던 것들에 대한 이러한 것들이 합리하다고 보느냐는 반문으로써의 하나님을 믿음에 대한 유익이, 이익 무엇이냐는 반문들이 합당하지 않음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나타내는 하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를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하늘을 만드신 것에 대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으로 다 말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는 듯한 입장이 합리적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범죄함과 의로움이라는고 하는 것은 다 사람들과의 상관성을 말하는 것이지 절대자와 상관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믿지 못하는 자로써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는 악함을 나타내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학대를 받는 것에 대하여서 부르짖게 되어지는데 우리의 존재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그것을 주목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서 말하고 있으니 첨부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로써 그들의 존재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 악함이라고 함을 인하여서 부르짖음은 악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일의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서 떠맡아서 해결해주어야 하는 고통적인 숙제처럼 하나님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대적인 인식의 분별없음은 그의 말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지식이라고 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며 지식 있게 말하나,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함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에서는 이러한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경우에 맞게 되어지는 그러한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 그 실제를 말하는 것이지 상식적인 경우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그러한 지혜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과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상식적인 오류라고 함을 가지고 마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합리적이냐고 할 때에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가운데서의 실제적인 판단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연민이라는 개념에서 자기 자신의 현상적인 판단에서의 실제의식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유익과 이익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상식적인 판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진정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제인가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될 때에 결국 인위적인 자기 본위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적인 상식적 판단의 실제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상식적인 판단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항상 하나님 절대자의 재가가 있지도 않는 가운데서 그 실제적인 판단이 성립된다고 우기면 그것이 합리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지식이 힘이다 아니다 라는 그러한 판단은 역시 둘 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의 여부로써 같이 생각하고 이야기 하고 상황에 따른 실제의 판단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 정당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 지혜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비록 그러한 합리적인 형태를 갖춘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지식 없는 말을 하는 자이며 지식이 없는 자들로서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삶에 있어서 합리적인 측면의 불공평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것에 대한 변론을 할 수 있고 합리성의 여부를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의 형태를 갖추는 지식 없는 말로써 합당한 자리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시간을 지나야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라고 함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합당함의 여부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지식을 말하지 못하는 지식의 형태만 갖춘 그러한 자리에 서서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어지는(호 4:6)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게 되어지는 은혜로써, 그 시험의 때를 지날 수 있고 진정으로 주 앞에서 합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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