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5월1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1:37-54
손을 씻는 바리새인들
일반적인, 일상적인 삶 속에서 위생관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생각하게 될 때에는 여러 가지 고칠 점도 있고 좀 지나친 모습에서 가정의 건강과 관계를 헤치는 경우까지 생각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요리할 때에 계란 껍질을 만진 손으로 씻지 않고 다른 음식을 손으로 만지게 되면 껍질에 있는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세균이 묻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음주문화에서 소위 ‘술잔 돌리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고 또 한 그릇의 음식을 여러 사람이 같이 먹게 되어지는 경우도 그러한 위생적 관념의 재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에 긍정적 요소나 편리나 정적인 관계라는 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반론도 많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구체적인 것을 모두 언급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위생관념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위생관념이라는 점 정신건강, 정신위생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라고 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에서 육체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의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 외적인 위생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면서도 정신건강을 위한 것으로써 제한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손을 씻지 않으심이라고 하는 것과 바리새인들의 손을 씻는 즉 결례에 관한 논쟁은 외적인 위생적 개념보다도 내적인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논쟁적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는 것과 그 결과적인 판단을 보겠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서의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 외적인 결례로써의 손 씻음의 논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본문을 통하여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5절에서 5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7절에서 4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과 귀신의 왕의 힘을 입고 있다는 중상모략에 대하여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음식 잡수실 때에 손을 씻지 않으심에 대한 것을 보는 바리새인들의 ‘결례’(潔例)에 관한, ‘정결케 하는 예식’에 대한 불이행이라는 그들의 이상히 여김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은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악독(惡毒)이 가득하다고 함을 지적하심을 평토장(平土葬)에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5절에서 5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자신들을 모독한다는 율법사의 볼멘소리와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자들로서 화가 있을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하심의 분명함과 구체적인 말씀하심은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고 하시면서 이 과연 이러한 자들의 세대가 담당할 것과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막았음에 대한 말씀을 하심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맹렬한 합리적 반론만이 무성히 있음에 대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목하면서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외적 위생적 문제에 국한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행하는 중심의 실제의식의 비교와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실제인가 하는 문제는 타락한 아담이후의 인류역사의 항상 질문되어진 것이며 실제적으로 답변하지 못한 문제의식입니다. 그래서 최선의 노력으로 그래도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것의 실제를 말하는 수준이며 하나님의 뜻하심 마저도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잘 정리하여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입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음식을 먹을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해낸 바의 결과적인 것으로 손을 씻는다는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신앙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임의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것이 아닌 입장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이입시켜서 합리성으로 꾸며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판단으로 그러한 기득권적인 측면에서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을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인위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것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한 자들의 모습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상관이 없다면 그들의 존재라는 개념과 그들이 말하는 지식의 실존의 정당함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서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라는 말씀을 이 세대가 감당하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증거자들로서의 선지자들의 죽음을 예비하는 악함을 말하는 전형적인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심은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증거적 실제를 의롭다고 하시는 합당하시다고 하시는 것의 주체가 나타났는데 그것에 반대하고 있는 자들로써의 그들의 모습은 대표적 실제로서 심판을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라고 함을 규정하심에서 너무도 합당한 심판의 판단을 하신 것입니다.
절대 자존의 하나님의 상대적 표현은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 합리성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겨우 상대적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의 논쟁에서는 이미 실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리새인들의 모든 맹렬한 합리적 판단이라고 함이 이미 기각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답변함의 의미적 실제가 없는 가운데 주님은 그곳을 나오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손을 씻는다는 개념의 정결함에서 그 정결함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그 정결함의 실제를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적인 상대적인 것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자들의 상대적 우위에서의 정결의 실제를 말하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들을 상대적으로 부인하는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신원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심’(롬 4:25)을 믿는 가운데서 주어지는 그 의롭다하심을 믿는 자들로써 우리의 삶과 존재와 증거의 실제를 말하는 자들로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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