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5월14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욥39:1-30
독수리가 거기 있느니라
어떤 방송프로그램 중에서 최고 오래한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 동물들을 소재로 한 퀴즈 프로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야생 동물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의 나름대로의 삶이라고 함과 법칙적인 측면을 주목할 수 있고 그만큼 ‘신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룰 소재가 많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고 그러한 덕분으로 소위 ‘최장수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인 측면에서의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것은 아니면서도 비유적 실제로써의 동물들의 생태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함에 대한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책망하시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하심의 증거와 그 종말론적인 증거를 주목하게 되어지는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 본문으로 나눌 수 있으면서도 사실 한 본문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고 또한 사실은 오늘 본문이 욥기서 38장과 한 단락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일차적으로 말씀하심의 한 단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맥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서 주목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비유적 개체로써의 동물들 일일이 다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예외적으로 그러한 것의 총괄적인 측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심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마지막에 언급되어지는 독수리의 경우가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되어지는 동물들의 특징들은 모두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라 들짐승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은 사육되어지는 것인데 가축의 우리 보다는 방목적인 개념으로 거의 야생적 개념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직접 경험하여 알 수 있어야 하는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느냐는 질문하심의 하나님의 뜻하심은 그만큼 많은 상대적 경험적 지식의 충족성을 말하느냐는 말씀도 되시면서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욥기서 38장과 39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인칭으로 욥에게 말씀하시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3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이 성경의 흐름을 따라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을 말씀하심으로 경험적 실제를 의식해서 말하고 있는 욥의 기득권적인 해석이라고 함보다도 앞서는 상대적인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으로도 욥의 자기 연민에서 분별없는 자신의 판단의 주권적 입장의 변호라는 개념의 합리성이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를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 그리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에 대한 것과 요나의 고기뱃속에서의 스올의 고통을 당한 것에 비교되어지는 질문과 하늘의 법도와 말씀창조에 대한 모방적 입장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성경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따르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서 4장에 나타나고 있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이상 중에 꿈을 해석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를 받지 못하여서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들짐승과 같이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단 4:22~37) 그후에 벨사살 왕의 모습 때에 그 나라가 망하게 되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저울에 달아보고 달아보니 모자라다는 말씀을 하심의 내용이 있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써 망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자로서 그러한 바벨론 그 이름의 뜻으로 ‘혼돈’, ‘흩어짐’의 왕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인데 그것이 그들의 주검, 시체를 의식해서 독수리들이 몰려들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식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욥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총명 지혜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찾지 않고 상대적 정황적 자기 연민에 따른 합리성으로 이치를 바꾸고 있는 것에 있어서 그러한 상대적 혼돈(混沌)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하늘의 법도적인 지혜가 그에게 있지 않아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써의 욥 자신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도록 들짐승들의 생태적인 것을 경험한 지식의 습득을 의식하도록 질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이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신 말씀’(눅 17:37)을 기억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바로 상대적 지혜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눅 17:37)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상대적 지혜의 충족성이라는 지혜가 많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배척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많고 적음의 충족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상관관계라고 함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 믿어지는 것이 지식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존하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도 믿음으로 허용되어지는 범위에서의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운데서 성숙한 자리에 서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야 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지혜의 많고 적음이라고 함의 실제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는 가운데서 상대적인 지혜의 혼돈 음녀 바벨론의 영향권에서, 독수리가 모이는 그곳에서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으며,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 합당한 지혜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자랑이 되시는 욥과 같은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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