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5월1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출17:1-16
오늘날에 여호와 닛시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기성세대에 있어서 그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교육의 한 과목으로써 ‘교련’이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마다 교련 사열을 하기도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교련복이 학생복과는 별도로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옷을 착용하고 학습을 받을 때에 기본적인 제식훈련과 총검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이 둘 다 모두 기본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디를 기준으로 ‘삼열 종대 헤쳐모여’ 그러한 명령이 있게 되어지면 그 기준을 알지 못하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군사정권에 있어서 있었던 기억들로써 지금에는 의미 없게 되어진 것이지만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생존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경우에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개인적으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적 행동으로 극기 훈련을 스스로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역시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군사 되어진 자들로서의 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신앙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여호와 닛시’로써 받으며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신 광야를 떠나 그 노정에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음으로 인해서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세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치라고 하심과 그 순종하심에서 반석에서 물이 날 것을 말씀하심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스라엘 자손들의 시험함의 그 중심은 여호와께서 자신들 중에 계신가 하는 악한 인식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 르비딤에서 아멜렉과 싸움을 하게 되어지는 것이 기록되어지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하는 그러한 상황이었는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승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단을 쌓아 이르기를 ‘여호와 닛시’라고 함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아멜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실 것에 대한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여호와 닛시’라고 하심의 그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모세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해되어지는 가운데서 언급하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신앙의 지표가 된다는 사실에서도 더욱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것은 그 뜻이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심에 있어서 특히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의 기본과 기초를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르비딤에서 있었던 이 두 가지 사건이라고 하는 것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실제인가 현실적 현안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라고 하는 그러한 기득권적인 판단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 여호와 그 이름에서 그 실제를 찾는 가운데서의 신앙의 표준과 신앙의 실제를 말하는 가운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르비딤에서 물이 없음에 대한 현실적인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의 여부가 판단되어질 것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써 반석에서 물을 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물의 스며듦’이라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가운데서의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위한 배려하심의 생명의 주가 되심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반석은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에서 현실처럼 꽉 막혀서 요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바위에 견주어진다고 하여도 주님이 함께하심에서는 그 실제의 삶의 인도하심의 실제를 말할 수 있게 하심으로 생명수 강가에 심겨진 복된 자의 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써의 아멜렉과의 싸움에서는 아멜렉 족속이라고 하는 존재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아들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팥죽이라고 하는 현안적인 실제를 하나님의 언약하심에서의 실제보다도 더 본질적인 실제로 알고 있는 가운데서 언약적 실제의 자리에 그 축복의 자리에서지 못함에 대한 것을 기억할 때에 그의 손자인 아멜렉도 그의 어머니 딤나 정해진 분깃의 아들이라고 하는 역시 현실적인 실제의 분깃을 그들의 존재의 연결선에서 이해하는 족속들의 실제관과 하나님께서는 싸우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선하심과 그러한 선하심을 이루는 것은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함으로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안식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의 실제적인 것은 현안적 상태의 충족성이라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르비딤’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평야’ ‘쉬는 장소’로 표현되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으로 그러한 장소에서 있게 되어지는 것은 현안적인 개념에서의 본질적 쉼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쩜 모래도 아니고 도저히 물의 스며듦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숨막힌 바위라고 하더라도 주님이 함께하신 가운데서의 모습이라고 하면 주님이 주시는 생수로서 그 참된 쉼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형제들의 연합함과 동거함의 아름다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그곳에 복을 명하심으로 영생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실제라고 하는 것 쉼이라고 하는 것의 실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의 실제를 말하는 기준이 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함이 오늘날에 있어서 ‘여호와 닛시’임을 말하며 또한 증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기준에서 그 정당함을 따라서 실제를 분별하는 가운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의 승리하심을 따르는 승리하신 주님을 따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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