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6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수7:16-26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판단의 기준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가져오는 견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견해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권위적 개념의 재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제품으로 좋은 것이라는 측면의 합리성보다도 전제되어진 명성이 있는 브랜드의 제품으로써 합리성의 동일한 판단이 있을 때에는 단연 후자의 경우가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야말로 견해라는 개념의 정체성 시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그처럼 슬픔의 골짜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 자를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아간이 뽑혔으며 그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의 사자가 아간의 진술에 따라서 그 물증을 확보하고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으며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간이 죄를 범하게 된 것에 대한 그 진술에서 그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주목하며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간의 진술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한마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그러한 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그것을 지배하고 파생케하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는 ‘안목의 정욕’(요일 2:16)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지으신 영광을 잘 나타내게 되어지는 자들로써 비록 타락하여서,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인식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담과 하와의 죄악된 인식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그 개연적 의식으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써의 하나가 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을 견물생심으로 말할 수 있어도 견물생심이라는 개념으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본질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하와에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와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가운데서 자기 합리화가 이루어졌고 사단은 그러한 합리성의 상대적 타당성으로 넘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의 모습이 오늘 슬픔의 골짜기의 표적이 되어야 했던 아간의 인식에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견물생심이라고 해서 상대적인 방법에서는 안 본다는 그러한 것이 최선이 되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으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판단하는 자리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다는 그 자체의 실제적인 판단을 분명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거의 본다는 개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보지 않는다는 개념의 확실성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도 분명 옳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행함의 온전함이라고 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진실로 그 본다는 그 개념의 판단의 실제적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통하여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었다면 피조물로써의 합리성의 재고를 요구하는 뱀의 당위성이 이미 결여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알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악함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 정당성의 시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의 기본적인 속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간도 그의 내력적인 집안의 사람들을 주목할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열려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을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견해 즉 그 안목의 정욕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슬픔의 골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본다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한 그러한 것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에 그냥 조심한다는 개념으로 일관한다면 그 안목의 정욕의 사악함을 인하여서 범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떠날 수 없고 그로 인한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분별하여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다는 개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본다는 개념의 사실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식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는 그 아골 골짜기의 판단을 넘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보는 사실들에 대한 견해를 분별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행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수7:16-26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판단의 기준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차이를 가져오는 견해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좋은 견해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권위적 개념의 재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신제품으로 좋은 것이라는 측면의 합리성보다도 전제되어진 명성이 있는 브랜드의 제품으로써 합리성의 동일한 판단이 있을 때에는 단연 후자의 경우가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함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야말로 견해라는 개념의 정체성 시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그처럼 슬픔의 골짜기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6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한 자를 가리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고 아간이 뽑혔으며 그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2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수아의 사자가 아간의 진술에 따라서 그 물증을 확보하고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으며 그곳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아간이 죄를 범하게 된 것에 대한 그 진술에서 그 아골 골짜기의 기원을 주목하며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하심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간의 진술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한마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그러한 말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지는 것으로써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그것을 지배하고 파생케하는 주의 말씀하심에서는 ‘안목의 정욕’(요일 2:16)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지으신 영광을 잘 나타내게 되어지는 자들로써 비록 타락하여서,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인식모습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아담과 하와의 죄악된 인식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그 개연적 의식으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으로써의 하나가 바로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을 견물생심으로 말할 수 있어도 견물생심이라는 개념으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본질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하와에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와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가운데서 자기 합리화가 이루어졌고 사단은 그러한 합리성의 상대적 타당성으로 넘어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의 모습이 오늘 슬픔의 골짜기의 표적이 되어야 했던 아간의 인식에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견물생심이라고 해서 상대적인 방법에서는 안 본다는 그러한 것이 최선이 되어질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러한 것으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함의 판단하는 자리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다는 그 자체의 실제적인 판단을 분명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거의 본다는 개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보지 않는다는 개념의 확실성으로는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도 분명 옳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행함의 온전함이라고 함에서 그 합당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진실로 그 본다는 그 개념의 판단의 실제적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가운데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통하여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믿었다면 피조물로써의 합리성의 재고를 요구하는 뱀의 당위성이 이미 결여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알 수 있는 가운데서도 그 악함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 정당성의 시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의 기본적인 속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간도 그의 내력적인 집안의 사람들을 주목할 때에 상대적인 인식의 열려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서 자존의 절대적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을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견해 즉 그 안목의 정욕의 자리에 서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슬픔의 골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인식함에 있어서 본다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고 또한 그러한 것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에 그냥 조심한다는 개념으로 일관한다면 그 안목의 정욕의 사악함을 인하여서 범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떠날 수 없고 그로 인한 슬픔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분별하여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다는 개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그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본다는 개념의 사실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식하는 자리에 서는 가운데서는 그 아골 골짜기의 판단을 넘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달려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보는 사실들에 대한 견해를 분별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행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