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2월 26, 2005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8:1-9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만왕의 왕 예수께서 탄생하심을 기념하는 성탄절 저녁에 인간의 나라의 왕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사사시대의 장로들에 대하여서 기록된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은 또한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받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의 왕되심에 대한 분명한 견해라고 하는 것을 사실로써 주목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심의 인도하심을 마음에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면서 좀더 주목하게 됨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방법과 과정에 대한 분별력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를 믿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또는 그 앞서 기획하는 가운데 있어서 그 결과를 예상하는 목적과 그것을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며 사람들의 생각은 목적우선이냐 아니면 과정 우선이냐는 그러한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 되어짐에 있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임의적으로 받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즉 목적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니까.. 또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과가 중요한 것이야 지금은 실증주의적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실적주의적인 사회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사회적인 인식의 조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성경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늙으매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음과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사무엘의 아들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함에 있어서 열방과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언급함에 사무엘이 기뻐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오래된 그러한 신앙적 옳지 못한 반목의 죄악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며 그들에게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왕을 구하는 모습과 절차적 개념의 판단과 행동에서는 그 정당함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과는 달리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은 이미 그 정당하지 못한 합목적성으로 부정되어진 것이라고함을 지적하심에서 그 절차적 방법적 정당함과 그 인식되어지는 신앙의 정당함이 이분되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함이 참되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주목함에 있어서 인위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본다면 아마도 합리적인 개념의 입장이 아주 매끄럽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들의 행함의 옳지 못함을 따라서 그 사사적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께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무엘은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참으로 스스로를 돕는 가운데 이스라엘 왕정을 열 수 있었다는 그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인본주의적 개념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개념의 합리적 도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정당하게 먼저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그 되어질 일들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시각이라고 하는 것이 미봉(彌縫)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들의 자신들을 결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정당하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자존적 판단이라고 하심을 나타내보여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7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섭리라고 함의 범주를 말하게 되는 것은 9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무엘에게 그들의 악함이라고 함을 말함과 그 왕의 제도를 허락함과 그 제도를 알게 하라고 하심에 있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가운데서 그 일들을 수행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기뻐하지 않음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지 않고자 하는 그러한 악함과 그것의 미봉되어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가운데서 어렴풋이 보게 되는 그래서 그들의 고통을 자초하게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처럼 기뻐하심을 나타내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왕정 나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실 것이고 그것의 시점을 나타내셨는데 사무엘은 늙은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깨어 있음과 분별함에 있어서는 한발 늦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지목하기 전에 그들을 책망하거나 하나님께 그것을 고하는 중심을 가지는 것이 옳았을 것인데 그러한 모습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점을 적극적으로 분별하지 못하였음에 대한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의 그 사역적인 기간이 끝나가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시대적 감각정도는 앞서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옳지 못한 인식의 미봉적 절차의 정당함을 나타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왕되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왕의 정체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하나의 부정적 개념의 왕의 제도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사의 좀더 신실하게 깨어 있음과 이스라엘 장로들의 신실한 인식에 관여되어서 주목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그들의 사태라고 하는 것 즉 사사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울 때에 그 질서적 당위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하심을 먼저 물어보았어야 함이 옳은 것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왕의 제도를 세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뜻하심을 구하는 것이 또한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었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옳은 인식이라고 하는 것과 올바른 절차적 정당함을 모두 갖추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더 축복되게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들으심이라고 함이 우리의 존재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자는 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함의 정당함도 같이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한 신약에서의 그 증거는 스가와의 아들들이 사도 바울의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는 가운데 귀신들이 그들에게 주장하여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행 19:14~16)

절차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방법론적 정당함을 찾음에 있어서 한번 더 유의하게 되는 것은 그 절차라는 개념에서 읽게 되어지는 과정 즉 시간을 전제로 한 방법적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읽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과연 오늘날 과정신학이니 역사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외곡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로소 아주 철학적일뿐이지 신학과 신앙적인 개념은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신앙과 신학 그리고 진보적인 신앙에서는 과정신학과 같이 시간이라고 함에서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그 풍성함을 소위 보수 또는 개혁신앙 보다 먼저 누리고 있지만 그 인식의 정당함의 사실은 전혀 모호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현대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종교개혁신학을 부끄러워하고 중세에 종속되어지는 현상을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는 고통이며 왕되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질서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재와 실제가 없는 고통의 번민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시간의 풍성함에서 분별이 필요함을 기억하게 되는데 이것은 시간에 대한 분병한 논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인식적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받고 규정할 수 있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기획하고 나타내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 되어짐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논리에서 비로소 인위적 구별을 하는 가운데서 고통의 문을 여는 자리에 서지 않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차와 방법과 합목적성을 규정하고 따르는 가운데 그 가운데 왕되신 주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도록 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예수께서 왕되심을 선포하는 귀한 자리에 서시는 은혜를 구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옛날에는 상대적인 초 자연주의적 관념론적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서 보수적인 신앙적 입장에서 역사적 신앙을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관화 시킴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것이 임의적인 생각으로 합당하지 못하게 논리적인 타락을 말하게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혼탁한 신학계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혼돈이라고 하는 것도 초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사사의 때와 같이 오늘날도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의 그 풍성한 선한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을 보수적 개념에서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현대신학에서 먼저 알고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찾을 수 있는 그 규정적 실제로 그것들을 새롭게 구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풍성한 신앙의 깊이와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신앙의 혼돈으로 그 세상왕의 제도적 고통을 초래하는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세월 그 시간에 대한 개념없이 그것을 아낀다는 것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나 그 인식적인 면에서 그 정당함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주 예수님안에서 구별되어진 그러한 것으로써 바르게 또한 풍성하게 그 뜻하심을 받들 때에 주께서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왕으로서 그 질서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구별하여서 비로소 가능성에 따른 것으로써의 세상왕의 제도적 굴레에서 벗어나 주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그러한 천국의 기쁨과 그 질서적 제도를 알고 바르게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되게 우리 삶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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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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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가 나셨도다

2005년 12월 25일 소망교회 성탄축하주일예배설교
눅2:8-20
구주가 나셨도다

이번 주일은 교회의 절기를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와 감사드리는 성탄예배로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 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데, 주님을 증거함에 더욱 마음깊이 두게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초로 하는 주일과 주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축하하는 성탄을 같이 드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또한 깊게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주가 나셨음을 기뻐하고 증거함에 있어서 유의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아기가 나심과 함께 그것이 우리에게 표적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을 바르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있으련만 주의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은 8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가 찬 그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영광이 저희를 비취매 그들이 두려워함과 천사의 증거로 두려워말라는 말과 함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음과 그리스도 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함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허다한 천군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감에 목자들이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고하고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목자들에게 증거되어진 그 내용과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송하며 돌아감에 대한 것을 기억하며 그 주의 천사의 전한 내용과 그로인한 주께 합당한 영광을 돌림의 은혜의 자리가 그것입니다.

구주가 나심이라고 하는 것의 기쁨과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 뜻하신 증거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적’(세메이온)을 말씀하심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읽도록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없는 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없다는 것의 내용적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본문에서 말씀하심의 그 표적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의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잘못된 성탄에 대한 이해 즉 표적을 잘못 읽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 중에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도 사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을 잘못 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현대적인 신앙에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인본적으로 돌리는 잘못된 타당성을 말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하나님을 자연의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자연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 표현의 취상이 바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의 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우주 또는 자연의 자기표현의 최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아실현정도의 모습이 가장 귀한 것이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심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신격화한 인생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신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 동의해줄 수도 있다는 식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성인으로 세계의 성인으로 말할 수 있다는 식에서 비로소 머물고 마는 입장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의 가장 잘못된 기반은 하나님을 자연으로 가정한 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주장할 뿐 그것의 사실적 정당함을 동의적인 차원이 아닌 자체적 차원에서는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다른 진정한 성경에서의 아기의 나심이라고 함을 바르게 읽은 표적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정당하게 취하시는 분으로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사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 그렇게 말하는 것도 상대적인 인식에서 해석된 표적에 대한 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합리성 자체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합리성의 진실함을 따른다면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계시를 말씀하심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아기 예수님의 자존의 하나님 이심을 자기가 드러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는 사실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그 판단가능의 정당함은 자존적 절대의 정당함을 의지하여 판단한 것을 실제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기 예수님이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스스로 상대적인 표현을 하신 자신이심을 받음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구주가 나셨다는 것은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고 또 편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의 보편적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진정한 누구나 받아 마땅한 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대의 보편성에 따라서 상대적인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의 사실을 정당하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의 하나님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정당한 사실로 받을 수 있는가 살피면서 야곱과 같이 돌배개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사실화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권세도 있게 되어진 것임을 읽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이단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의 태양신의 생일을 빼앗아 왔다는 것으로 그 정당함이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과 기독교가 그러한 이방종교로 타락했다는 어리석은 또한 잘못된 생각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과 동일한 사람은 그 생일을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하여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상대적인 합리성에서 비로소 판단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하신 날을 고고학적으로 살펴보고 정확한 날을 알 수 없다면 최선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에게 주신 제사장적 권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신 제사장적 권세를 성도들에게 부여하심과 그러한 것의 순종으로 우리의 상대적인 새로운 것이나 삶을 사실화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의 사역적 형상을 우리 성도들의 삶에 나타낼때에 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운데서의 한 날을 구별하여 드림은 적극적인 그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 사역적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제사장적 입장에서 믿음으로 합당하게 새롭게 구별하여 사실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도 그와 같은 점에서 합당하게 구별하여 축하하며 경배함이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써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은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예수께서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상대적으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의 자존적 정당함을 취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하심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적 사실을 구별하여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는 것이 그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기예수 나심에서의 그 증거를 받은 목자들은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진실로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마음에 둘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서 그 증거의 사실의 확실성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받게 하심의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고 하는 잘못된 지성들과 일그러진 이성들이 그 정당함의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아니 알지 않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기예수 나심의 표적에 혼란을 가져다주며 평안이 없는 혼돈 속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기 예수의 나심의 표적을 바르게 바라보면서 주의 주신 평화가 함께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주의 구주나심의 사실을 증거하시는 가운데 '기뻐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사 52:7)을 재촉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종들이 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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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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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2월 19, 2005

사무엘과 미스바

2005년 12월 18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7:1-17
사무엘과 미스바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12월 달입니다. 이맘때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내년의 계획을 위한 것도 점검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으로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는 것과 신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이질적(異質的)인 개념은 아니면서도 다른 개념으로 말할 수 있음을 유념함이 옳은 것입니다.

이질적이 아니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신앙이 삶이라고 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고 실제적으로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차이로서 다른 개념임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현실 속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의식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를 분별함을 말하는 것인데 그 분별의 기준이라고 함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중심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여졌고 그 아들 엘리아살이 궤를 지키게 되었음과 그날부터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온 족속들이 여호와를 사모함에 대한 것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의 내용이 되어지는 것으로서의 한 상황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고 여호와께 기도하리라는 것을 말하매 이스라엘들이 모여 그곳에서 금식하며 회개하는 중심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함에 따라서 사무엘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응답하심이 있어서 큰 우뢰를 발하심으로써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고 이스라엘 앞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패하게 하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였음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은 것도 탈환하게 하시고 평화가 있게 하셨음과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음과 라마 자기 집으로 돌아옴에 그는 또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음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이 다스리는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로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자신을 돌아봄과 거룩함의 경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의 의미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주목할 때에 우리의 삶에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적 자리에 세우심의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의 뜻은 ‘망대 파수하다 감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회집을 생각할 때에는 모두가 알 수 있는 곳이나 또는 잘 알려진 곳이나 또는 회집의 성격상 용이한 곳을 찾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의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러한 곳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시적인 것이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가운데서 성경으로 특별영감적 구별되어짐을 말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하심에서 구별되어진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존재할 경우 그것의 합당한 실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망대가 아니라,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그 섭리'(삼상 3:19)를 따라서 그가 명령하였음을 기억할 때에 더욱 그 미스바라는 곳과 관련된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의 이름에서 그의 존재와 사역적인 증거가 있는 자로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뜻인 것과 같이,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 망대를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들으심과 그로 인한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회집과 회집장소가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교회를 예표적으로 읽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우신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뜻하심을 따라 행함이 기본인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부분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마 6:9; 눅 12:2)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입술의 언급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우리 인생의 생각과 판단과 행함의 총체적인 방향이라고 함에서도 그 뜻하심을 읽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사실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그 정당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본이 바로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의 진리의 말씀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도 그 방법을 취하심에 있어서도 자존의 정당함으로 선택하실 수 있는데 그 취하신 방법으로는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고 하신다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라고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함에 있어서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세워진 질서로서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주의 뜻하심을 따라 사실을 분별하여 받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와 윤리적 행함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도덕적 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 반성이라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범함에 있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사상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주민으로써 하나님나라의 기업의 이방인들로서 형태적인 측면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소송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가 자신들의 신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가운데서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들의 기업이 자신들의 것임을 정당화하려고 했었습니다.(삼상6장참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한 그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법궤를 돌려주었는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법궤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다는 점과 전에 그러한 상황에서 이겼음에 대한 기억들이 한번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다시 재압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이 인식하고 이스라엘의 기업에 대한 논쟁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을 법궤라고 하는 것에 한정되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자존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의 모습을 축소하며 그 상황적 판단을 상대적인 것으로 비로소 인식하는 것인데 이것은 상대적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는 자의 모습으로 마땅히 그들은 범죄하여 죄값을 치루게 되었고 그들은 그 기업소송에서 오히려 불법적인 기업을 돌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이방인들로써 주의 다스리시는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에서는 군웅활거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정체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 정당함에서 사실화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중세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의 승리가 되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몸된 교회를 판단할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읽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신앙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벧엘을 말함은 야곱과 같은 언약의 백성들로써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 천국을 소유한 자들로서 길갈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한 자들로서 할례를 행함으로써에 비교되어지는 믿음의 세례에 따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것과 같은 자리에 선 자의 모습을 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스바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현실을 판단해 나가는 경건의 사실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상황에서 비로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의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회개의 자리에 설 수 없는 비극의 사실을 강요받아야 하는 불쌍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무엘과 미스바, 주의 말씀에서 합당한 종들과 성도들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이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사실을 규정하고 그 가운데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자신의 죄악의 사실을 인하여서 회개하는 참된 사실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심을 이루는 자들로서의 합당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로서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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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28, 2005

이가봇의 영광

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4:1-22
이가봇의 영광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을 비교하여 ‘속빈 강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래 과자류로써 ‘강정’이라는 것은 아주 맛있고 좋은 그것이지만 형태적 특성을 고려해서 실속이라는 개념의 부재를 가르킬 때에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증사회에서나 결과가 중요한 그러한 것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을 하는 그러한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과들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나중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되어지는 일들에 대하여서 실증적인 개념은 있어도 그것의 판단 기준의 신실하지 못함에 있어서 실제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실재와 실제적인 것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회이면서도 그것의 기준이라고 함을 바르게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가 추구한 그 영광과 실제는 의미를 상실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 진정한 실제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상대적인 것만을 따라 비로소 판단하는 실제적인 판단은 그 영광이 떠난 것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참되게 신앙생활하게 되는 가운데서도 실상은 그 영광이 의문시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모습은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신 가운데서 등불을 켜지 못하는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됨과 비교되어지는 정황으로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행함에서 패배하고 어찌되어진 것인가를 논하는 가운데서 실로에서 그룹 사이에 계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음과 그 제사장들은 엘리와 비느하스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충천하였고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이 상식선에서의 경건의 모양을 취하며 담대히 이스라엘과 전투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기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전투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엘리제사장에게 패전 소식과 아들들의 죽임 당함을 이야기하매 나이 많고 비둔하여 눈이 어둔 그는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산기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아기를 낳게 되며 죽어가는데 그의 증거는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비느하스의 아내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실증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모습이었음을 주목하며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하는 것을 켜지 못하는 미련한 자로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표현하시고 있음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대조되어지는 가운데서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등불이 모두 꺼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패배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엘리에게 알려진 것이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34; 삼상 3:13,14)

이러한 주의 말씀하심을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나타내심의 사실을 믿었다면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을 회개하게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도록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러한 것은 기록되어지지 않고 있고 처음부터 상식적으로 상대적으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는 개념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인 말씀을 하심과 그 가운데서 사실 규명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 자신의 목이 부러진 것의 사실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의 며느리, 그의 아들 비느하스, 그의 기업의 영광인 그가 볼 때에 그가 그 기업을 실제적으로 이을 수 없음을 주목하는 비운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좀더 주목하면 엘리의 가르침은 상식적인 설명의 합리적인 것만 생각하고 있지 그것의 재가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로 말미암는 현숙한 여인으로서의 며느리 즉 자기 기업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자식은 그 낳은 자의 기업이라는 말씀을 기억할 때에 그 기업으로써 홉니는 손으로 치는 자 ‘복서’를 의미하고 즉 폭력을 가하는 자이며 비느하스는 그 이름이 ‘뱀의 입’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정당함을 입지 못한 입술로서 간교함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와를 타락시켰던 뱀은 하와에게 합리적인 설명으로만 일관하여 비로소 타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서의 정당함을 무시하도록 한 아주 간교한 모습이었는데, 그것에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비느하스 즉 ‘뱀의 입’이라는 것으로 그의 기업을 가지려고 하는, 즉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 정당함이 없는, 합리성만으로 낳은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인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죽으면서 한 말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가봇이다’라는 말에 담겨진 내용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서 그 영광이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의 해석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떠났다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인 개념에서 개연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면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과 같은 모양은 있을 수 있으나 그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실제적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달려가는 가운데서도 상대적인 납득당위성만 생각하지 말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과 그 사실규정을 바라볼 때에 이러한 이가봇의 영광의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이 갈수록 빨라지고 지식이 더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그러한 것이 필요하고 또한 세상의 답변을 온유함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만 상식선에서의 설명과 비로소 당위성을 생각하는 그러한 모습들은 진정 세상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빛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지혜로운 처녀들이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뵙기에 예비하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뜻하심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규정을 말하고 증거할 때에 참된 복음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구원의 복음의 사실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실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그 ‘이가봇의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참되게 세상에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온전히 증거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등불을 밝히는 깨어있는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주님을 맞이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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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김

2005년 11월 27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8:15-35
불쌍히 여김

사람으로서 어떤 타인의 입장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한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러한 하나님을 바라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식여부와는 상관없이 남아 있어 상식적인 사람들의 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위한 살기위한 노력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상품화 또는 판매 전략화 시키는 경향이나 아니면 속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값싸게 팔아버리는 자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왜곡되어진 가운데서 가치전도(顚倒)적인 생각 속에서 성도들의 모습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어그러진 자들의 모습이 교회 안에도 밖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베품의 지혜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의 말씀하심이 이어지고 있는데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그 사람과 상대하여 말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또 세 사람으로 증참하게 하는 것과 교회에 말하여서 교회 공적인 측면에서 권면해도 받지 않게 되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과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합심한 기도를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실 것과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1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 주어야 할 것인지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함과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 답변하신 것으로써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탕감 받은 자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도록 하시며 그것을 알지 못한 자가 옥에 처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 주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말씀하심에서 베드로가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함과 그것에 대한 답변하심이 나타나고 있는데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땅위에서 이루어지게 됨에 있어서 그 분별력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기준으로서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써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로서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을 삶에 분별력 있게 온전히 나타낼 수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손으로 몸으로 행함에 따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것과 같으면 그러한 것을 온전히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눈으로 판단하고 경험한 것들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구별되지 않는 가운데서 사실의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겠다고 하는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는 그러한 것이 경험론자나 현상적 입장에서 볼 때에 어리숙한 자의 모습으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의 판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보편적 판단은 그러한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중심이 가히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한 것의 일환이 길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양무리를 칠 때에 그 양이 잘못을 범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질서적 의미를 찾아서 목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질서적인 것이란 개인적으로 또 두세 사람의 증참으로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교회의 하나님 앞에서 판단되어진 가르침을 가르치게 하여서 받지 않는 자는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라고 함과 그 사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개념의 사실은 주님이 이후에 심판하실 때에 있게 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의지적으로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이방인으로서 생각함의 사실적 판단이 가능하고 재가가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에 있어서 주의 말씀을 성경적인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말씀하심에 있어서 받지 않음은 이미 결정적인 것인데,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그 연약함이라고 함으로 반복적일 때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또한 기만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형제들의 연약함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된 실수는 받아야 하지만 기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분별하도록 주님께서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 옥에 처하게 되어지는 자는 불쌍히 여김이라고 함의 마땅함을 분별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탕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았음에 대한 사실을 임의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임의적인 개념으로 또한 그 미련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탕감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빚으로써 당위성을 가지는 것임을 기억할 때에 그에 따른 행동의 당위성에서의 바른 윤리적 가치를 가지는 가운데서 자신에게 행한 자에게 판단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판단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의 존재의 모습으로서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탕감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정당함에서의 사실규명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은 임의적 자신의 정당함에서 사실규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게 되는 것은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권세라고 함이 실제적으로주어졌다고 함을 말할 때에 분별의 기준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요 19:30)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에서 죄 용서함을 입은 종들은 믿는다고 하는 형제들의 연약함에 있어서는 항상 열어놓지만 기만적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 사실 규정을 하는 중심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연약함을 받게 되는 불쌍히 여김을 받음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실로 받음에 당연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게되었는데 그 사람의 증거가 합당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을 때면 의래히 자신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서 위기모면을 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하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기만하는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어떤 비슷한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불상히 여김'이라는 점에서 맹목적으로 용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열매로 보아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따라 판단하려는 중심이 있는지 그 여부로 판단하여 형제로 받아 불쌍히 여김으로 대하든지 아니면 이방인과 세리의 모습으로 받음에 있어서 그 합당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의 질서에 따른 권징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도 그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을 알지 못하여서 교회의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큰자로서의 마땅한 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그러한 자들로서의 마땅한 가르침을 가르치지도 못하는 것으로 주 앞에서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천국에서 큰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 아버지의 집에 왔습니다는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한 모습이 교회의 출석의 당위성과 사실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곳에서 큰자로서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써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적인 것으로 말씀하심을 깨닫고 받음에 있어서 모습이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이 나타나는 것의 실제적 모습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 서는 것과 또한 목양에 있어서 양의 탈을 쓰고 오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즉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규정이라고 함에서 신앙의 사실로 받는여부를 따라서 형제된 자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베푸는 마땅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서, 주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사실 규정을 받아 주의 말씀을 진정한 사실로 받으며 그 말씀하심 안에서 형제들을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의 큰 자라 칭함을 받으시는 자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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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1월 24, 2005

꺼지지 않는 등불

2005년 11월 2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3:1-21
꺼지지 않는 등불

어두운 곳을 가게 된다면 반드시 갖추게 되는 것이 등불 오늘날로 표현하면 전등과 같은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건전지가 소모되었다든지 아니면 불빛이 약해서 계획에 또는 해야하는 어떤 일에 있어서 차질을 빚게 될 때에는 상당히 마음고생을 단단히 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그 능력과 영광의 빛을 잘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식을 느낄 때에는 그보다 더 참담한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디에서 그러한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에 나가게 될까요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의 사무엘에 관한 말씀하심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0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섬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는 것과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라고 함을 말하면서 밤에 하나님이 성전에 있던 사무엘을 세 번 부르셨음과 엘리의 조언으로 하나님께 응답함을 배워 잠자리에 들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0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네 번째 여호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큰 일을 하실 것과 엘리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함과 그 이유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아침까지 누웠다가 엘리가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물어보게 되는 것과 사무엘이 그것에 대하여서 숨김없이 답변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심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사무엘과 그 당시에 하나님의 계시가 사무엘에게 있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신다고 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이 두 가지입니다.

먼저 대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하나님의 질서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내면서도 그 질서라는 개념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지 못할 때에는 질서적 정당함이 부인되어지고 주의 뜻하심 안에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질서를 창조적으로 선택하시고 그 뜻하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기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자로 은혜를 베푸심의 자리에 세우심이 그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이름의 뜻으로부터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존재적 입장에서 사실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엘리의 모습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진정 그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함의 뜻하심을 따라서 신앙의 양심대로 섬겼던 것입니다. 즉 부정되어질 수 있는 상대성 속에서도 주의 뜻하심 안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는 엘리의 성전에서 그 제사장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언급한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그러한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에게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께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실구별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적당한 상식적 가르침으로 죄악을 죄악의 실제로 생각하지 못한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와 같은 자존의 하나님의 뜻하심에서의 실제적인 사실 규정을 받게 되어지는 것이 없는 가운데 '멸망의 가증한 것들'(마 15:24)이 있게 되지만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되어서 한 가지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나는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고 그러한 자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위한 열정을 가지도록 말씀하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서 받쳐진 어린 아이의 믿음의 오병이어로써 벳세다들녁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주의 축사하신 것을 제자들이 나누어주어 사천 명을 먹이신 것과 같이 어린아이의 믿음의 중심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게 되어질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서 사실 규정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린 것을 업신여기고 그렇게 행한 아이들의 잘못과 그와 같이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실제적으로 가르쳐 회개하게 하는 것을 행하지 않은 자들이 책망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사도의 가르침으로서의 성경말씀 안에서 그 삶의 정당함을 찾을 때에 과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는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 자신의 뜻하심을 스스로 절대 정당하심 안에서 나타내시고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의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는 세상의 빛이라고 함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등불이 꺼져가는 듯한 모습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엘리야도 그렇게 그러한 고민에서 굴속에 있고자 했던 것인데, 이것은 진정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귀한 것이며 참으로 어둔 세상 속에서 주의 구원과 영광의 빛을 발함에 있어서 애통하는 종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등불로서 세상에 빛으로서 오신 예수님의 구원하심과 영광은 꺼지지 않는 등불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등불을 든 종들로서 신부된 자들로서 주 앞에 항상 깨어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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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31, 2005

마음이 슬픈 여자라

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삼상1:1-28
마음이 슬픈 여자라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하게 되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기쁠때가 있고, 화가 날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고 즐김의 낙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인식적 삶의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인식 중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하여서 오히려 두렵게 여기고 상황적 어려움 때문에 의도적인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아이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사람의 기업으로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치의 상대성에서 그 불확실성에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자들과 아이를 낳고자 소망하는 것이 고통인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에, 가치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주의 말씀의 사실 규정에 따라 축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시 127:3)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 여인을 통하여 주의 계시의 말씀하심을 나타내시고 있는데 주목하며 그 뜻하심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었고 그는 두 아내 브닌나와 한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제사장 엘리가 시무할 때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엘가나가 브닌나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한나에게 갑절을 주는 그러한 분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하였던 것입니다. 열아들 부럽지 않은 남편이 있음을 호소하였으나 한나의 슬픈 마음은 이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 아기를 주시면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고함의 서원함과 기도하는 한나가 기도함을 보는 엘리가 술취함으로 보는 오해가 있을 때에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함을 말하고 엘리의 축복으로 다시 그는 집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9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한나가 엘리의 축복에 이어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께 경배하고 집에 돌아갔다가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사무엘을 낳았음을 기록하고 있고, 사무엘이란 이름한 아이를,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를 지나, 믿음으로 젖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이행하고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기를 낳은 여인과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여인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일반적인 상황의 전개를 취하시고 주장하셔서 계시적 뜻하심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들으심이라고 함의 정당함을 찾아내는 자들로서의 모습으로 교회의 모습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산지의 사람 엘가나의 가정에 한 일인데, 이것은 에브라임 즉 ‘열매가 풍부한’이라는 그 뜻함의 족속에서 그 열매의 재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을 위해 여호와께서 그의 아내 중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뜻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의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의 시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취할만한 당위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일상적인 개념에서는 그 때까지 되어오던 상식적 입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먹는 열매라고 하는 것이면 매일 먹어오는 것으로써 그것이 오히려 그렇게 행해왔다는 것의 당위성으로 별반 의심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그 열매의 풍부함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태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중심을 알 수 있도록 고통도 허락하셨으니 그것은 브닌나라고 하는 같은 아내 된 자의 성태되어짐 즉 태의 기업으로써의 아들을 낳음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둘 수 없었다가 하나님의 뜻하심안에서 정당함을 얻는 그러한 아들의 출생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믿을 수 있었던 것과 그것을 위해 주 하나님께 서원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이를 낳겠다는 인간적인 신념의 도출로서 한나의 서원을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까지 부끄럽고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야 하는 당위성을 느껴야 하는 자리까지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그의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뜻하심의 증거적 실재를 주목할 수 있게 하심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해를 입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고 고통하는데 그곳에 사단으로 지칭될 수 있는 뱀이 기다리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날개를 허락해주셔서 광야로 가서 양육하게 되어지는 것에 비교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12:1~6)

물론 이것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되어지면서도 주의 몸 된 교회의 모습과 양육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의 동일선상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받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 한나의 말을 읽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애통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마 5:4, 1~12)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한나’라는 이름이 바로 ‘은혜’(grace)라는 듯입니다. 세상은 기뻐하는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애통하는 자들의 모습이 그 은혜의 사실 속에서 주어지는 현상적 모습인 것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함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분복의 잘됨들을 말하는 것도 포함하면서 중요한 것은 그것에 비로소 판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을 따른 형통은 현실적인 고통과 슬픔이라고 하는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자리에 나가게 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얻게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들으심’, ‘그의 이름은 엘이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이 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써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절대 정당함의 재가가 있는 그러한 것으로써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아이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 사무엘을 한나가 하나님께 그의 생애를 드리는 서원을 이행하는 것은 복음으로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소유되어진 자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그 말씀으로 양육되어진 종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자녀된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일반적으로 한나의 아이를 낳고자 하는 중심의 모습이 현실적인 욕망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나처럼 그러한 중심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 정도의 모습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지 않으심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받들기 위한 뜻하심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의 분량은 다르나 동일한 표현으로 아기를 위한 동일한 표현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의 그 슬픈 여자의 모습은 은혜를 받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정당함에서 형통의 사실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움을 받게 되어지는 은혜의 사실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주의 뜻하심을 따라서 복음으로 사람을 낳아 길러내는 가운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애통하는 가운데서 마음이 슬픈 여자의 모습의 은혜의 여인 한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들으심의 축복받은 실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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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2005년 10월 30일 소망교회 종교개혁주일낮예배
롬1:8-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전해진 신앙은 중요하게 받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전통이라고 함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전통의 사실과 실제를 말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과 거짓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옳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다 각기 다른 개념이면서도 같이 나타나는 현상적인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모두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이런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면서도 옳게, 틀리면서도 옳게’, 또는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로써 ‘다르면서 옳게, 틀리면서 옳게’라는 것은 하나의 통일성을 말할 수 있고 그러한 것은 믿음의 분량을 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이 조화되어진 교회의 모습으로 받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다름을 인하여 거짓되게, 틀림을 인하여 거짓되게’ 나타남은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개혁의 사실을 말할 때에 분리적 입장의 사실을 취하여야 함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31일에 루터의 면죄부 사건에 대한 토론을 위한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 ‘캐슬교회당’ 문에 붙임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그 종교개혁에 대한 분명하고 실재적인 것에 대한 증거로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적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서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기본이 되어지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쉬지 않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과 만나보기를 심히 원하였는데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견고케 하려 함과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는 길이 막혔지만 빚진 자로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심과 같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사도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라고 함에 있어서 참된 종교개혁의 실재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의 자리에 나감에 대한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뵈뵈 집사를 통하여서 로마에 써보낸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서 정의하고 있고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마의 성도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과 그로 인하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앞서, 먼저 복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롬 1:2)

이처럼 복음이라고 함이 그 아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서 어떤 중심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신앙을 부끄러워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참된 옳은 자리에 서지 못하는 거짓된 자리에 서는 모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아들에 대한 바른 신앙과 그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가이사랴빌립보에서 고백한 그 내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주님 예수님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며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모습과 현상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절대 정당한 자신의 거룩함으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형태로 사람들의 인식할 수 있는 형태의 모습과 인식적인 표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써 오셨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은 육체로서 혈과 육이 있는 자들로서 그러한 것의 재가를 얻는 동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즉 그것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계신, 저를 자녀 삼으신, 구속의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식에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써 재가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유비적인 개념을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표현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의 현상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의 분별력이 없이 자신들의 상대적 입장을 상대적인 인식 가능성의 재가만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과 사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외에 전함에 따라 저주의 자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절대 자존적으로 취하신 절대 정당함을 통하여 상대적으로도 하나님의 절대 의로우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나타내셨음에 대한 것을 사도 바울은 표현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주 안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빚짐을 말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사도로서의 마지막 전함의 대한 소명이 그의 빚짐의 먼저 증거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나는 그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만으로 일관하거나 임의적인 내용으로 주님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옳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가 전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재가가 있던 그 신앙의 고백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셔서 상대적인 모습으로도 절대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써 우리 구주 예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의로우심과 의롭게 하심과 구원하심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믿는 중심을 가지도록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개혁이라고 함을 사람들이 말하면서 어떤 분리 이탈만이 능사인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고 어떤 모자란 사람의 견해를 따라서 창조를 위해 기존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기존의 교회의 모습에 탈피를 말하는 새로움을 개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되고 악한 것입니다.

체제에 도전이라는 개념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다고 하여도 주께로부터 정당함을 찾는 중심이 있다고 하고 그리고 그것의 객관적인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신실함이 나타난다고 하면 교회의 통일성의 한 개체적 모습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신실성의 객관적 판단의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한 모습도 취할 수 있지만 그러한 형태만이 그리고 그러한 형태에서 비로소 개혁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참된 신앙의 자리에 서는 것인데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로 인한 의로움의 실제가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 현실적인 실제에 나타나고 있음을 받으며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실제를 규정하고 받으며 누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질 때에 진정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이어가고 주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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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24, 2005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2005년 10월 1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6:1-12
삼가해야할 바리새인의 교훈

어떤 일이나 임무를 행할 때에는 어떤 그 일이나 임무에 대한 것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이고 또 주의 사항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주의하지 못하다가 실수하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지불해야할 책임이나 보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러한 작은 것이 큰 것을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임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고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또한 하셨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에 떡 가져가기를 잊었음과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여 자신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시는 말씀과 함께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겨진 것이 얼마였는가를 상기하도록 말씀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떡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과 함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을 말씀하실 때에 그제야 제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 현실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현실을 분별하여 받는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가치의 중요함은 인식하면서도 그 중요함의 기원적인 잘못을 바르게 고침이 옳은 것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만드신 것을 이끌어 그에게 주어 이름을 붙이도록 하셨는데(창 2:19) 그것은 그 이름을 부여하는 인식의 주권을 가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적 주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함과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사람들의 그러한 이름을 부여하는 주권행사라는 것과 그 앞서 그 인식이 주권의 정당함을 임의적으로 행하는 그러한 악함이 있어서 자신이 행하지 않아야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자신들이 이름을 붙이고 주관하려고하는 그러한 잘못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것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측면에서 주목하면 마태복음 16장은 마태복음 15장을 전제로 하는 내용을 이어서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하심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의 연속성에서 말씀하심이라는 것과 시간적으로도 제자들이 그 떡을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논의라는 그 배경에서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나타내심의 뜻하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망하심과 고쳐주심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하라는 말과 삼가라는 말씀이 동일한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프로스케테’,‘프로스케인’으로써 ‘프로세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의하다'는 말과 또 '배를 육지에 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단순하게 대다는 그러한 말까지 포함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의 가르침으로 그 목표되어질 수 있는 것에 접근해서 판단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할 때에 그들의 말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판단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그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재고하고 판단하여 분별하고 주장하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배척이라고 함이 하나의 그러한 판단의 하나가 되어질 수 있지만 적극적인 측면에서 한 방법이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주권적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 (누가복음 11:42)에서는 십일조를 행하는 여부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도 그들의 외식은 버리고 선히 합당하게 주께 드림에 대한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이 그 한 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러한 옥석을 가리는 주의라는 개념을 오늘 본문에서 시도할 때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말과 주님의 답변하심에서 읽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난데없는 그러한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즉 본문의 정황이라고 할 때에 오천 명을 먹이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즉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써 표현되어지는 그 기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질문하는,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인식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평범하게 나타나는 형태를 취함에 있어서 그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표적이 나타나든지 상식적인 이성이라고 하는 것의 이상하게 여길 그럴 형식의 기적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비로소 된다는 중심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예언과 분별이라고 하는 것도 하늘을 본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후에 대한 변화로 세속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으로 그들이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 천기를 분별한다는 그 표적을 분별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것과 관련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멍에씌우는 자로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것과 그들이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는 그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임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 그 표적이라고 함을 인식함의 있어서 그것을 사실로써 규정함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기적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비로소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오해하며 또 조소하는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가져온 것을 일제히 풀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렇게 일치되어지는 행동을 하였을까 그정도가 납득이 되어지지 않는 기적이라는 식의 인식을 하려는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앞서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사흘간 주님과 함께한 자들은 현상적인 개념에서는 그와 함께하였다는 의미로만 말할 수 있지만 주 예수께서 그의 구속의 뜻하심을 나타내심에 있어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하는 자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자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의 성도들이 주의 제자들 사도들과 그들의 인정함을 받은 종들을 통해 주어지는 양식으로 그들의 존재적 건재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주의 주시는 영생을 통해서 주의 구원하심에서 존재적 정당함을 입을 것을 말씀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그 사실의 실제를 믿으며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친 바를 따라서 행하게 될 것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주장하셔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초자연적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식적 이변으로 생각하는 기적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서 알아볼 수 있는 인식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측면만 생각할 때에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소경된 자들과 같이 저주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전한 바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6-10)

이러한 것은 일관된 주의 중심을 사도들이 비로소 깨달았고 사도의 반열에 뒤에 들어선 바울도 분명히 알아서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마음에 일관되었다고 함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하심과 같이 책망을 하셨는데 이것은 기분적인 개념에서 주님의 실족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저주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 대한, 분명히 그들이 합당이 받아야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늘 본문과 같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음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마 12:31~40 참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시고 그 다스림의 기본적인 것으로 이름을 규정하도록 하셨는데 그러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함을 입었던 것으로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역시 뱀의 후손의 말을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중심에서 현실을 규정하고 사실화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 되어지는 것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어 현실을 규정하며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회복된 자의 권세를 행함은 바로 주의 말씀 즉 사도들의 전한 말씀 안에 한정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상대적인 그러한 한정적 편협성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재가와 절대 보편성의 부여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시각을 가진 가운데서 현실을 규정하고 주장하며 판단하고 다스려나가는 것임을 믿을 수 있고 믿으며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인식의 주권적 행함으로 현실과 사실을 규정해야 했던 아담의 모습에서 이제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따른 인식의 정당함을 의지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분별하고 주의하는 가운데서 삼가게 되어지는 참된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금기적 개념만으로 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분별하여 행한다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자의 증거로 믿음으로 재가 있는 스스로 행함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금기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믿음안에서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부터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현실규정과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현실은 현실이나 그것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그러한 것을 비로소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를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며 사실화하려고 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저주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말미암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서 참되게 신앙생활하시는 가운데 참으로 합당한 주의 성도들의 길을 걸아가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힘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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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7, 2005

아멘 찬송

2005년 10월 12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2-24
아멘 찬송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아보도록 하시며 또 교회를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될 때에, 그 가정에 나타나는 자녀의 성장에서 주의 뜻하심이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도 있음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이가 막 태어나서 손이나 발에 ‘누구누구 아기’라는 이름을 달고 자기 이름을 가지고 누워서 칭얼거리는 가운데 몇 날을 잠 못 자게 하더니만 언젠가 밤과 낮을 가리고 뒤집기 한판.. 기어 다니고 일어서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한 발짝씩 걸어 오가는 시도를 할 때에 얼마나 아름답고 예뻤었는지.. 그 때에 부모의 마음에서는 ‘아이고 내 새끼 다 컸네..’의 말이 울려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구만리 같은 인생여정이 길게 남아 있지만 아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에는 그러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마음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말로 고린도교회를 믿어주고 자랑하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과 디모데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증거하는 바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라고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강 사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교회가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의 자랑이 되고 사도 바울과 그와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자랑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15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이 그 확신을 가지고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이르려고 하였다가 일정을 바꾸어서 가지 않음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음에 대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만 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함이라고 함을 말하면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고린도교회를 아끼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사도와 그 함께한 자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 함과 이는 고린도 교회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지 아니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이유로써 고린도교회가 믿음에 섰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를 위한 그러한 이유에 순종하게 되어진 것의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사도의 순종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후 1:20)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멘이라는 의미와 믿음에 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 후서에서 가장 전반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게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의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마치 하나의 기만적인 사실로써 세월속에 묻혀지는 것인 것과 같이 잘못 인식되고 있었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논리와 실증적 개념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에,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의 실재와 그 거룩성에,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대적인 인식의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고 또한 부활하심에서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정당함을 입을 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의 거룩함과 그 사실을 비로소 합당하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그 증거되어지는 것이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의 절대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으로 절대의 진리로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의 주관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이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의 부여됨에 따라 진정한 사실이 될 수 있기에 상대적인 정황적 형태의 판단과 정당함에서 비로소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정황적 좋은 것으로 아니요라는 그러한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고 진실로 아멘 즉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순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게 되어지는 설교 말씀도 주의 말씀의 재가를 받는 것임을 분별하여 받을 수 있을 때에 아멘이라고 주 앞에서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에 섰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게 되어진 가운데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를 비방하는 아직 실제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의 임의적 인식에서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행함에 따른 신실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그리고 그의 가르침까지도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의식하면서 오늘 본문을 사도 바울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일정을 바꾸어 고린도교회에 오지 않음에 대한 의미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사도 방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실제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인도하심을 사실로 받아 일정을 주신 믿음에 따라 바꾸었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적 직접적인 그 이유라는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고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섰다고 하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가 완벽한 성장을 했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부활의 사실을 상대적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월속에서 비로소 판단받는 것과 같이 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주의 부활의 사실은 역사적 판단을 비로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주의 부활하심에서 그기준에서 진정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에 기본이 되어진 점을 사도 바울이 마음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직접 사도를 대면해보기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 그가 가르친 주의 말씀이라는 것보다도 사도 자신이 말한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사도 바울이 인식한 것으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다도 사도 바울으 더 연모하고 따르는 즉 바울파의 행동과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루살렘의 교회에 연보하는 문제도 있는데 사도 바울을 보아서 억지 연보를 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두번째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은 믿음으로 주 앞에서 정당함을 따라 사실로 받기를 원하는 그 믿음의 기본을 망칠 수도 있는 정황적 모습을 사도 바울은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한걸음씩 막 걸음마를 내딛는 성숙함을 위해 잘 걷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걷는 아이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은 오히려 방해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그 신앙의 기본이 되어진 것이 성숙함에 나갈 수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인식이 이 마지막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아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또 일부에서는 그러한 것을 훈련차원에서 권하는 모습을 보는데, 다소 지나친 모습을 취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습관을 따라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그 중심의 표현으로써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면서도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진실'로 '진리'로 주님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적 뜻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멘'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대적인 형식과 형태로 기록되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라서 그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의 부여와 재가로 아주 보편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이라는 뜻을 잘 분별하고 바르게 사용하며 나타내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주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찬송이 되어지는 그러한 영광중에 주 앞에 드린바가 되어지는 믿음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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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0월 13, 2005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2005년 10월 9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마15:29-39
일곱 광주리의 떡과 물고기

신앙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거나 또는 신앙생활에 대하여서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가장 기초적인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는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을 해결해주지도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현실적인 정당함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그러한 현실적 당위성을 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질문에 즉 '그들의 질문에 온유함으로 답변을 준비하라고 하심'(벧전 3:15; 골 4:6)에 따라서 그 말씀하심을 찾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2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그곳 즉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바리와 불구자와 벙어리 소경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두매 고쳐주시매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32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한 무리들이 사흘이나 되었으매 굶겨 돌려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는 말씀하심에 제자들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시고 떼어주심에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어 배불리 먹게 하고 그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으니 먹은 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심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모으신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음에 대한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 신앙에 대하여서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현실성이 없다는 개념으로 그 당위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이 ‘신앙생활하면 그것이 밥 먹여주나’, ‘교회 나간다고 옷이 나와 밥이 나와’ 등등의 신앙에 대한 현실성이 없음에 대한 임의적 판단으로 그것을 반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기준에서 현실을 말하며 그것을 기준으로 당위성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지혜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떡을 가지고 사흘 동안 함께한 자들 그 큰 무리들에게 떡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심은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으로써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구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에서. 현실적이라면, 그럼 지금이라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나타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하여서는 계시의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다는 것에서 비로소 그 정당함을 얻는다면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의 반복의 여지를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부당함도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가운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럼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동일한 형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그러한 반복이라고 함이 지금의 자신들의 반복의 요구를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배고픔이라고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계시적 반복이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반복이라고 하는 것이 여럿의 가능성을 위한 것으로 열려진 것이 아니라, 주의 증거로서 그 신실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증인으로 세울 때에는 둘 이상 세우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반복적 의미는 바로 증거로서의 객관성을 가진 또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둘 이상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는 증인으로서의 모습으로써 모습들로서 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증거의 내용으로써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구체적으로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성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 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시는 것으로 도의적인 차원의 어떤 기적적 의미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 그당시 현실적인 판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즉 주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심을 나타내시는 삶의 연속성에서 본문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하심을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사건으로써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증거와 사실로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먼저 사흘동안 주님을 따라 다른 자들을 굶겨 보내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신 것은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현실적인 증거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지적 개념과 상관이 있음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동안 무덤에 머무실 때에 그와 함께한 자들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부활의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예표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굶겨보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는 것으로써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해 진정한 영생이라고 함의 생명을 나타내시겠다는 자기 계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에서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생명의 떡, 영원의 생명을 위한 떡으로써, 영생을 얻을 주의 말씀으로 존재의 생명의 정당함과 그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말씀을 예표하는 그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떡과 물고기는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상식선에서도 주님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당연한 자연스런 모습이지만 우리가 이미 합당하게 기억하고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을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그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뜻하심의 실제를 현실적인 실제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후에 아주 잘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6~9)

즉 주님과 함께한 사도들과 그들의 신임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이 그 사역을 돕고 그들을 통하여서 생명의 떡으로써 물고기와 떡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주의 사도들의 전한 바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실재와 실제라는 생명 자체와 그 사실을 받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천명을 먹이신 사역과 아주 좋은 비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 주님께 드려졌다는 것과 사도들과 그의 신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 영생의 말씀이 그 영생과 함께 그 사실의 누림의 축복이 아주 평범하게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주께서 받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며 주님을 믿어 주님과 법적으로 죽었으며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자신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으며 찾는 자들이 주의 성도들이며 주의 먹여주시는 종들이심을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오병이어를 통한 기적이나 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아주 현실적이라고 함을 말씀드렸던 것을 좀더 분명히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실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말하여 변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실재가 역사성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고 할 때에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방향이라고 함을 분명히 해야하며 역방향의 인식은 정당함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한 신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으로 현실의 실재를 주관하시고 나타내신다는 것과 그것에서 현실의 사실성을 말함이 형태적으로는 편협함을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절대 보편성에 있어서는 진정한 보편적 생각과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당위성에서 본다면 편협한 사고인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지만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과 보편성이 재가되어지는 성경의 안목과 그 사실의 판단은 그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사실들이 재가를 받아 현실이 진정한 사실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위해 신앙을 조작하거나 필요성에 따라 해석함은 그 정당함이 결여된 것으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도 편협한 사고와 비판되어질 수 있는 사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위해 하나님이 떡을 오늘날도 주지 않는다는 정황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의 기뻐하심이 판단받을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이 밥먹여주나'는 말의 속에 담긴 당위성은 부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 22:35)

말씀을 맺습니다.

현실적인 실제에 대하여서 이해.. 본문 16절에서 오해의 소지를 지적 5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란 말씀을 기억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가운데서 그들이 필요한 현실적인 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제자들이 떡 가져오지 못함을 놓고 아쉬워하고 고민하게 되는 가운데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실증적으로 나타나야 되며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요 진정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이 평생 먹을 것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께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지냈던 것과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로 섬김을 받게 하셨던 것과 같이 초라하지만 그들은 다함이 없는 가운데 기근의 때를 면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과 같이 그 베풀어주시는 상을 기뻐하며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기신 일곱광주리의 고기와 떡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항상 예비해주시는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재적으로 실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진정으로 사실로써 고백하며 또한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동일한 고백속에 주님께 대답하며 우리의 치열한 삶 속에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마심으로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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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0월 10, 2005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2005년 10월 5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후1:1-11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서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베풀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떤 힘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베풀 힘이 없는데 무슨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힘을 기르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가졌다고 하는 그 힘이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 있어야 남에게 베품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식적인 점에서는 분명히 말할 수 없고 또 다만 정도면에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베풀기 인색한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변명이 가능하고 또 베푼다는 것의 행위가 있어도 그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으로 그냥 식상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위로를 서로 베풂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식상해짐의 강요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안부 인사로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축복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능히 환란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심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바울과 함께한 디모데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침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위로 하고 위로 받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구원과 그들 자신의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음과 이는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었음을 알게 하셨다고 함을 증거하고 있고 또한 그와 같은 지금과 이후에도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줌으로 도울 것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도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사역을 위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전 1:4) 이 말씀의 실제적 의미라고 함의 증거를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코가 석자나 빠진 주제..', '자기 발등에 불떨어진 줄도 모르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삶의 완전하지 못해보이는 가운데서 남을 돕는다는 개념은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며 조소의 모습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처지를 감안하지 않고 무분별한 도움이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서 맹목적인 옹호를 말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당연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분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상황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상대적 현실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인 당위성을 얻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서신을 전제로 한 인식을 가진 교인들의 소식과 그들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전에 보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서신을 전제로 한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옳은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가장 중심이 되어지는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에 관한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심의 정당함을 부여하는 기름부으심을 받은 주님의 부활에서 그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만물이 새롭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것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정당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개연적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인 임의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즉 성찬에 드려지는 포도주와 빵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시고 추태를 부린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실을 말하는 부활의 실재와 실제의 합당함을 제대로 알지 못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함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성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하심 안에서 시간의 범위에서 비로소 판단 받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 세월의 흐름 속에 판단되어지는 지워지는 상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부활사실에서 읽게 되어지는 구속하심의 은혜의 풍부함과 그 사실은 우리의 현실의 크고 작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2)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아무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실제의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가공적 또는 형식적인 이야기로 인사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가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고전 15장의 내용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실제적인 증거와 위로와 인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시비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명쾌히 답변하였는데 그러한 것 즉 그러한 질문과 회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상황적 정황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볼 때에 그리고 고전 16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지역교회에 연보를 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속된 표현으로 '고만 고만'한 자들 그렇게 유력한 자들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 연보하는 모습도 참 기만을 위한 것으로 읽혀질 수 있었던 정황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 부활을 본 자들도 다 죽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성장한 지역교회의 모습도 아닌 교회들이 작은 가난한 교회에 연보한다고 하는 모습들은 그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기만되어진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가능하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부활의 논의를 정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의 말이 득세할 수 있는 정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이 세월속에 묻혀버릴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으로 시간의 판단을 받지 않는 사실로써 세월속에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셨다는 것과 그것을 인하여서 그 말씀하심 안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1장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 진정한 사실을 의지하게 되는 은혜가 있으라는 축복의 실제적인 사실을 증거하며 동시에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제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그의 사역속에 어떻게 나타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의 실제라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서 사도 바울은 그 '은혜와 평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제 코가 석자나 빠졌다..', '자기 발에 불이 떨어진줄도 모르고..'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판단과 그러한 인식의 강요를 받게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안에서 분별할 때에 그 섬김으로써 도움이 합당하다는 판단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상할 수 있는 현실에서의 능히 남을 도울 수 있고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형제들의 연합과 교제를 믿음으로 행할 수 있고(시 133:1)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받들 수 있는 것입니다.(사 40:1, 사 49:3)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하심으 받들 때에 그 사랑의 위로를 나타내며 교제를 행할 때에 어떤 무분별한 그러한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별을 함에 있어서 상황적 정황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에서 비로소 그 판단의 사실을 말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의 뜻하심 안에서 행함에 당위성을 살피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작은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서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되어지는 종들의 증거와 위로로 협력하여 주의 뜻하심을 이루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작은 삶들.. 넉넉함과 빈곤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들이라고 할 때에, 비교판단하여서 할 수 있음의 여부를 비로소 판단하는 것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심이라고 함을 믿음으로 잘 분별하여서 사르밧 여인의 한줌의 가루같은 것으로도, 벳세다 들녁의 사도를 통한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모습으로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서시는 가운데 참으로 능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귀한 주의 종들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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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22, 2005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2005년 9월 21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35-58
사망이 이김에 삼킴바 되리라

한번은 학생들과 성경공부하기 전에 고민되는 질문이나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는데, 어떤 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 축구하는데 두 팀 모두에 크리스찬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 이기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기를 하는데, 경기의 승패가 있을 경우 지게된 팀의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가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못하지 않은가요?’라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의 답변으로는 경기에 이기고 지는 것으로 기도를 들어주심에 대한 판단을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즉 이기는 자의 영광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또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의 주의 축복하심과 영광은 비교되어서 비로소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사실을 상대적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는 상대적 여지를 따라서,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부활의 상대적 납득 가능성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들의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전반적인 존재부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자들이 있는데 부활이 있다고 함을 말하는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목하며 또한 받으며 또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부활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말하고 있고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그러한 이어지는 인식과 그에 따른 질문을 의식하는 가운데서 씨와 형체의 차이는 그 상대적으로도 비교되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 연속성을 말하게 되는 것과 같이 즉 형체가 다른 씨앗이 자라서 식물이라는 형체가 되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실제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체로써의 육체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영광도 다 다름에 대한 것으로 동일한 영광의 상대적 비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늘에 속한 영광, 땅에 속한 영광,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으로써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핑계치 못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기록된 계시된 말씀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며, 그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시며, 비로소 살려주는 영이 되심을 말하고 있고 그에 따른 형상과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0절에서 5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혈과 육, 썩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며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되며 우리들도 변화되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음을 입을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전반적인 증거의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측면에서 표현되어지고 증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지는 것으로써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출 7:10~12)

고린도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 성찬식의 포도주와 떡을 임의적으로 먹는 것과 같은 불량배적인 모습이 죄악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인식되어지지 않고,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교회의 질서와 증거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증거이며 이것은 부활의 참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난 교회의 ‘쓴 뿌리’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때 정황적으로 볼 때에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도 시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쇠퇴하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던 것으로 부인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활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연보를 해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서 각 지역교회의 모습들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상황에서의 현대적인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인가 그러한 초라한 모습에서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위로하는 거짓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이 있느냐는 그 사실 시비적인 인식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그것의 현실성적인 증거도 있다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그 현실이라고 함을 상대적이지만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있다고 하여도 몇몇 사람들인데, 그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 초라한 모습에서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초라한 것을 더 구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인식적 시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게 되는가 하는 시비적 입장의 인식을 가진 자들이 사도 바울의 말에 목을 매는 것을 사도 바울도 의식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참고)

부활의 모습에 대한 상대적인 설명을 요구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씨앗과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나는 형체의 연속성에 대한 것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씨와 식물이라는 형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현실과 모습들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말함에 전혀 비교되어지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럴 가능성의 상실이라는 느낌에서, 우리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형체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측면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확신할 수 없는 부당한 임의적 말을 하고 있음에 어리석다는 표현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던 고린도교회의 모습들과 지역교회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들의 연보로 서로 돕고 있는 모습과 많은 빈곤한 모습이 있다고 할 때에,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닌 위로차원의, 임의적 자위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을 말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자고 하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이 가능한 것과 비판이 옳은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 여러 영광들의 모습의 다양성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실존과 사실을 믿는다면 그 절대 선하심을 기억할 때에 상대적으로 영광이 비교되어져서 부끄러운 쇠퇴하고 버려야할 영광으로 자리매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즉 연보를 하고 연보를 받는 교회의 모습들, 그 모습들이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런 모습에서 또한 도움을 주는 자나 받는 자들의 모습들도 그렇게 실제적이지 못한 모습들, 성도들의 그 때당시의 풍족하지 못한 모습들, 그러한 것들에서 그 영광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그 영광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볼 때에 모두 사라질 사실로써 부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도 상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론적 비판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상대적인 비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함은 그 상대적인 것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개념을 주권적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은 가운데서도 시간 속의 진리로 나타내신 바를 기억하도록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예수님이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존재부정이라는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심을 나타내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심에 대한 증거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로서 그의 뜻에 합당한 자들에게 그 존재적 정당함을 부여하시는 기름부으심과 구별하심으로 주의 말씀을 다르는 자들의 존재를 영생을 얻도록 사실화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의 재가가 상대적인 형태로써의 성도들에게 그 존재와 삶과 섬김에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인 판단으로의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적 규정은 비로소 성도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것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창세전에 정하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 세월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진리의 말씀 진리의 사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의 증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좀더 주목해보면 그 앞서 사도 바울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증거와 비교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출 7:10~12)

애굽의 왕 바로 앞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에 애굽의 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지팡이로서의 뱀이 그 애굽의 지팡이로서의 뱀을 삼킨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지팡이로 여러 기적을 행하던 가운데(출 7:15) 그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출 14:16)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부활의 사실의 실재를 부여받은 자들로서 나타내시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시며 세상의 존재적 정당함이 없는 간교한 지혜의 상징으로써의 상대적 지혜는 그 존재가 이미 하나님의 이기게하심 즉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입은 상대적 지혜에 삼킨바가 되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도록 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부활이라는 그 사실과 그 재가를 받은 하나님의 지혜의 실재는 모든 상대적인 핑계라는 간교한 지혜의 실존을 부정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를 손에 들게 하시는 것과 같이 이제 주의 부활하심과 그 뜻하심의 재가를 받는 지혜를 믿으며 마음에 두며, 주의 뜻하심을 위한 그 믿음의 섬김의 손을 뻗어서 주의 영광의 구원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즐거히 믿음의 선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간교한 말의 존재적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고, 또한 그 부활의 사실의 정당함을 믿는 자들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따라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을 믿는 자에게 이김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바됨의 말씀이 응하심을 기쁨으로 받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을 잘 달려가시며 이후에 나타날 예비된 면류관으로 주께 돌려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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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5, 2005

부활이 없다 하느냐

2005년 9월 14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5:1-34
부활이 없다 하느냐

‘모든 것은 세월이 말해준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라는 말과 같은 세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며 우리의 곁을 지나는데, 그것의 보편적인 인식은 인정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고통의 시절도 잊고 즐거움의 시간도 망각이라는 바다에 버리게 되는 것이며 세월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무상함을 느낀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실제한다고 믿었던 그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후대의 사람의 기억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억한 바가 없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사실이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다만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실증적인 개념에서 다소 유익을 허구라고 하여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산 증인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죽고 몇몇정도 살아 있다고 할 때에 그 사실을 현대의 요구에 따라서 재해석되어지고 현대에 맞도록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의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0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 그리고 본문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33, 34절 말씀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속지 않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은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믿을 수 있는 자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란이 있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의 열정적인 측면에서 실증적인 실리적인 개념으로 자신들의 합리적인 이유를 따라서 판단하고 그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주 안에서 진정한 사실을 도외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라고 하는 것의 가장 큰 기본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부활의 확실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5:12 참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은 여러 파로 나뉘어서 자신들의 실리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가운데서 마치 사무엘과는 다른 엘리의 제사장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한 성찬의 예물을 임의적으로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그러한 악한 모습 ‘불량배의 모습’(삼상 2:12)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엘리의 아들의 모습(삼상 2:12)과 비교되어지는 것과 같이, 자존의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서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즉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도 패역의 쓴 뿌리는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의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한 가운데서 쓴 가라지의 열매가 되어 교회의 합리성만 추구하는 가운데서 주 앞에서의 정당함의 사실로서의 합리적인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서신의 결론적인 부분에 와서 바로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3절과 34절에 그러한 합리성을 비로소 의지하는 자들의 부활의 사실의 부인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하심과 그들이 악한 동무임을 지적하시면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으로써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내용들을 주목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전한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이라고 함과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 증인들이 있다는 현실적인 실제의 실증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역사성을 말할 때에 역사라고 하는 것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실증적인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적인 실제적인 것만을 비로소 의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본문에서 말씀하심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 증거의 말씀은 주의 평화 언약, 즉 예정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것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어진 사실들입니다.(엡 1:4,5)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하심(요 17:21~24)을 품었던 자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2:16)

창세 전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은 '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 사실로 시간의 판단을 받는 세월의 흐름의 판단에서 생성과 쇠퇴와 부인되어지는 사실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시간의 시작 세월의 시작을 말하기 전'이라는 개념도 시간의 표시이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함을 지적하시는 지혜로운 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상대적 합리성의 상대적 완전성과 충족성을 비로소 의지하지 않고 있는 입장을 기억할 때에 그것은 비판 가능한 입장일뿐 아직 정당함의 재고를 하지 않는 질문이 되어질 것이며 그러한 지혜의 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그에 대한 묘사를 상대적으로 표현하실 때에 그것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가운데서의 합리성의 연속성은 상대적인 불연속성이라는 말로 비판의 형태를 띠면서도 연속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은 바로 그 합리성의 존재를 비합리적이면서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의 자존적 정당함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전이라는 말이 비합리적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서의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시간의 범주 전에 있다는 표현이 정당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실증적인 현실적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것이 상대적으로 세월이 지난 후에 쇠퇴할 수 있는 그러한 것으로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의 부당함을 말하면서도 그것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즉 세월의 범주를 벗어나는 세월의 판단을 벗어나는 진리로서 세월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존의 절대자가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시길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때에 역사속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실의 형태로 진리로서 말씀하심에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 세월 속에 쇠퇴 소멸되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라는, 존재를 모두 휩쓸고 존재부정으로써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그러한 판단 속에서도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소멸해버리는 가운데서, 인식되는 정황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판단하여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한 홍수가 있어도 그 사실을 붙들게 되는 자들은 세월의 판단과 정죄로 인한 홍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부활의 사실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소리에 속지 않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 '다시 주님 안에서 살아남'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의 판단을 받지 않는 영원한 실제의 사실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말은 합리성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존립 정당함은 임의적이라는 사실에서 그 부인의 사실은 세월이 판단 받는 날, 창조된 시간이 판단 받는 날에 같이 판단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최후의 심판 때에 판단을 받는 자들의 모습을 오히려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적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 말자체도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즉 그것은 절대의 재가를 받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 기본은 그 공식적인 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바를 역사속에 사실로 나타내심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이 없다는 그러한 말, 정당함이 없는 말에 속지 않고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깨어 있어서 선한 행실을 하며 죄를 짓지 않고 주 앞에서 의를 행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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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 받은 영광

2005년 9월 11일 소망교회 주일저녁예배설교
삿20:1-16
책망 받은 영광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던 일을 행하는 경우에는 상당히 온 몸이 아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금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몸에 어느 한 곳이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픈 것과 같이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청년의 기력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간과할 수 있지만 기력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경향이 아주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몸된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몸의 작은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전체가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한 지파에서 이루어진 것이 전 지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지파간의 전쟁으로 비화되어지는 시점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길르앗 땅에서 나왔으며 온 백성들의 어른들과 보병 사십만이 모여서 한 레위인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라고 하고 그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자신의 첩으로 베냐민에서 욕보인 것에 대하여서 의견과 방책을 낼 것을 말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베냐민 기브아에 가서 그들의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고 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본문의 말씀인 12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그 악이 어찜인지 그리고 그들 비류한 자들을 죽여 악을 제하여 버리기를 구하였는데 베냐민 자손이 도리어 듣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고자 하는 중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몸의 아픔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파들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레위인의 억울함을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이유는 레위인의 첩을 베냐민지파 기브아 사람들이 성적으로 욕을 보인 것과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에 대하여서 그 첩의 몸을 쪼개어서 각 지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죄는 바로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권위적 정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첩에 대하여서 성적인 음란함으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것은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인데 그것이 민족의 죄로 비화되어지는 것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레위인의 직접적인 죄와 더불어 이스라엘 단 지파에서는 한 레위인 미가의 만든 신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공식적인 자신들의 우상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공식적인 지파의 죄악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실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레위인의 이러한 악한 모습과 자극적인 선동으로 행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그들은 그 선동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지파들의 전쟁에 말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가운데서는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죄인 우상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우연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는 그러한 죄를 범할 때에는 그 말씀을 맡은 자들이 먼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그들의 존재와 영광이 버려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한 변론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쓴 뿌리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잘 믿는 교육용으로 형상을 만든 것에 대하여서 정당하게 말하는 구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그들의 영광이 다 떠나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여러 가지 절차적인 개념에서는 잘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억울함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위한 협상적인 측면에서 그 진위를 알아보려고 한 것은 잘 한 것이나 이미 그러한 일이 있게 되어지는 것에 기본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 가운데서 합당하지 못한 레위인의 악함이 교회의 쓴 뿌리가 있게 하며 교회의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주의 말씀하심의 진정한 사실임을 기억할 때에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그러한 죄악에 타협한 그 영광을 위해 주의 몸된 교회에 악을 행하는 일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이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따른 것으로써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 상대적이라는 맹목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의 사실을 인위적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진정 주의 말씀이 사실임을 깨달아 그 말씀에 진실한 순종을 하며, 잘못된 자신의 ‘책망 받을 영광’을 추구하는 가운데 교회의 어려움을 초래하는 그러한 죄악의 자리에 서지 않고, 주 앞에서 진정 신실한 종들로 서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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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12, 2005

주 손으로 덮으시네

2005년 9월 9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3:1-9
주 손으로 덮으시네

자신의 어떤 생활에 대한 것을 적고 그것을 관리하고 하는 것은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일기를 쓰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손으로 감추게 되고 또 자기만 보고자 하는 책이나 정보등도 손으로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가 아닌 기성세대에서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부여하는 것에 대하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손으로라도 가리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만의 기쁨을 사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자녀들을 택하신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하고 기뻐하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이 주의 권능의 손으로 주의 택한 백성들을 덮으시며 보호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사실적인 증거를 근거로 믿음으로 받음을 우리 성도들은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것과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과 거짓 선지자들을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한다고 칼로 찌르는 일과 선지자가 예언과 그 이상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의 종임을 말할 것이고 그들의 팔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때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목자를 치실 것과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주께서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온 땅에 삼분지 일은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을 것과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시험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을 말하며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일주간에 대한 예언과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호산나 찬송 부르는 자들의 영접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같이 그 생애 전체가 공생애적인 것이면서도 고난 일주간에 대한 것으로 다시 한번 전반적인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함과 동일하게 예언되어지고 있고 현실에 증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스가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게 되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맹세의 시대, 그러한 죄로 인해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지 모르는 시대에 함부로 임의적 사실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 그의 가르침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어 생활하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도성 예루살렘으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요 교회의 시대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예언하는 자들을 그 낳은 자들이 칼로 찌름과 같이 거짓된 신앙의 정적인 자기 정당함을 따르는 거짓된 경건의 모습이 있는 즉 경건의 모습이 있으나 경건의 실상은 부정하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자녀들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막기를 원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인식을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신앙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그 주님오심에 대한 간절함 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러한 진정한 사실을 사모하고 그것으로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상에게 맹세를 말하는 그러한 것으로 자학한 모습을 한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친구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교적인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과 거짓된 모습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의 목자를 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것은 그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그로 인하여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 작은 자들 삼분의 일 위에는 주의 손을 드리울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세우신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의 세 아들과 같은 기업과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 삼분의 일인 셈족의 언약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드리게 되는 자들임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세아들과 관련된 것으로 말하는 것은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주권적 정당함에 따라서 예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5~27)

오늘 본문에서 삼분의 일이 멸해지는 것은 함의 족속을 제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삼분의 일이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 것은 셈족 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족속의 경우는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삼분의 일이라는 축복의 말씀에 동참하게 되는 것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삼분의 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의 족속이라고 함은 그 이름이 '셈'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기반을 둔 족속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셈족 계통이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약의 처음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전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을 기억할 때(마 6:9~13)에 셈족 계통의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구원과 생명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작은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하심 안에서 그의 소유된 자들을 손으로 덮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의 깊이와 사실을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세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는 오늘날 모두 불가지론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자존의 절대자가 상대적인 것으로도 사실을 말씀하심에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심에 있어서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는 그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사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심을 믿는 것에서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임을 믿고 진정한 사실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주의 축복하심의 손이 드리워진 자리에 선 자들의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골 1:24) 원했던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믿음의 달려갈 길을 잘 달리시고 주께서 예비하신 면류관을 주께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그 기쁨의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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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8월 27, 2005

열매들의 기쁨

2005년 8월 26일 소망교회 금요철야예배설교
슥10:1-12
열매들의 기쁨

상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이율배반적인 개념 때문에 실생활에서 어려움이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 중에 하나가 생활 쓰레기들의 처리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잘 분해되어지지 않는 소위 썩지 않는 것으로, 아니 상대적으로 썩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것은 썩지 않음이 영광이 되고 어떤 것은 썩는 것이 영광이 되며, 또 썩는다는 것이 불행이 되어지고 썩는다는 것이 영광이 되어지는 그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열매라고 하는 생명체가 그러한 것의 증거의 자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열매라고 하는 것이 심겨져서 싹을 틔운다는 것이 썩음의 불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그 결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영광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고, 그렇지 않는다면 소위 썩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싹을 틔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영광이 없는 것으로써의 썩음으로 돌아감을 의미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쩜 찌끼와 같은 것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열매에 비교되어지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함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오늘 본문에서는 그 열매들의 기쁨을 말하는, 에브라임의 기쁨을 말하고 있음에서 성도들의 기쁨과 그 증거와 그 능력을 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이라고 함이 허탄한 것이며 복술하는 자들의 헛됨과 백성들이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니 하나님께서 목자들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인 것은 수염소에 비교하고 있고 싸움에서 여호와가 그 백성들과 함께 함에 그 말탄 자들이 부끄러워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유다족속들이 견고하게 되고 요셉족속을 구원할 것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며 그들을 들으리라는 것과 에브라임이 용사와 같이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휘바람을 불어 모을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셨음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열방에 뿌리심과 그들이 원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 땅에서 돌아오며 앗수르에서 모으며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이끌어 가실 것인데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는 것과 그들로 고해(苦海)를 지나게 하시는데 그로 인해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며 애굽의 홀이 없어질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 여호와를 의지하여서 견고케 하실 것과 그 이름을 받들어서 왕래할 것을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심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열매로 비교되어지는 자들의 기쁨과 그 삶에 있어서의 그 영광과 고난과 그들의 행보라고 함을 읽게 하심으로 주님의 길을 행하는 자들을 그들의 종으로 받으심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암 3:7) 그리고 그것이 또한 예비하는 종들의 기쁨과 능력이라고 함을 읽게 되며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적인 스가랴서의 내용적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어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어지는데 사람들은 안일한 열국과 같이 믿음으로 스스로 행하고자 하는 중심이 없고 그 재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거짓된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는 그러한 자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오늘 본문에서는 수염소에 비교되어지는 자들로 이러한 상태에서 목자가 없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고 그 허상의 목자들을 치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봄비라고 하는 것도 이스라엘의 비오는 절기의 첫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때에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번개라는 것을 이방신화를 고려해서 이방신의 특성으로 이해함보다도 이 번개라고 하는 것은 천둥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비가 옴에 대한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의 부딪힘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으로 기술적으로 보아도 비보다도 먼저 발생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아모스 3장 7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에게 알게 하지 않고는 결코 먼저 행하심이 없다고 하심과 같이 비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판단의 빛을 부여하시고 그 가운데 되어질 비소식에 예비하도록 하심의 은혜를 말씀하심으로 오늘날 마지막 심판의 때를 살고 있는 현 교회의 시대를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써 역사적 그 때에 실제적인 주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의 갭이라고 하는 것 그 차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그 역사적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것을 말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것으로 주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에 대한 그 때 당시의 실제적인 증거자들로서 성전을 건축할 때에 종말적인 양상이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지 않고 안일하게 있으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드라빔 즉 자신들의 기업의 증표로서 지계석으로써 역할을 하는 것을 옮겨놓아서 또는 힘으로 밀어붙여서 유익과 열매를 구하는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 나와서 오히려 주의 백성들을 자신의 임의적인 신앙의 모습을 위한 것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주의 백성들과 함께하심으로 그들의 신앙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실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을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알게 되어 부끄러워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게 되는 그들이 그 하나님의 들으심에 따라서 에브라임이 그 마음이 즐거워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열매되어진 자들 성도들로서 합당히 받으신 바된 자들이 그 마음의 실제적인 기쁨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또한 열방에 뿌리운다는 말씀을 하심을 듣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씨뿌리는 비유의 주님 말씀을 이미 본문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씨뿌리는 예를 들어 말씀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정황적인 것에서 비로소, 또는 사람들이 알기 쉬운 것이라는 것에서 비로소 취한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씨뿌리는 비유로 성도들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주님도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의 신실하심을 아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합당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씨뿌림에 있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앗수르에서 나오게 하셔서 앗수르의 교만을 낮추신다고 하는 것과 애굽의 홀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상대적으로도 결코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과 세상의 왕권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이 부정되어지는 것으로써 메시아의 절대 왕권으로 다스리심이 나타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씨의 영광 그 열매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썩어진다는 불행과 고통이라고 함이 있지만 그것이 이미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서의 합당함이 있게 된 것으로서 결코 불행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은 죽으시고 상대적인 존재부정이라는 죽음의 상대적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신 자존의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단은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것으로써 주의 온전한 뜻하심과 그 기쁨과 그 영광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것의 기본적이고 첫 번째가 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이유와 그것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라고 하는 고해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 광야에서 죽는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여도 부활의 주님을 따른 그 영원한 구원의 생명과 그 복음으로 낳아 길러낸 주의 성도들로 인하여서 주께 돌아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서 이제 우리 성도들도 이른 비, 늦은 비와 같이 은혜의 비를 내리시는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주의 구원하심의 길을 예비하며 그 면류관을 주 앞에 드리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기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이와 같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주의 받으신 바되시는 열매들로서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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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04, 2005

주님의 떡과 잔

2005년 8월 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고전11:17-34
주님의 떡과 잔

지난 세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자녀를 많이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귀하게 자라고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방임하는 경향과 같은 느낌을 종종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 떠들더라도 소위 기죽이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묵과하고 서비스차원의 기관이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도 참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부모된 입장에서 서로가 이해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 아이들의 버릇없음에 대한 것에 책망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측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일수록 합당한, 경우에 맞는, 책망을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한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서 바른 인성으로 자라게 된다고 함을 말하게 됩니다.(잠13:24 참고)

현대의 사람들보다도 앞선 세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교육이라고 함을 기준으로 사람의 행함에 대한 판단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을 빌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증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교회의 질서에 대한 기본단위로써 가정에 대한 인식이라고 함이 오늘날 세대의 사람들 보다는 앞선 세대에서 더욱 잘 의식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 안에서의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주의 떡과 잔에 대한 합당한 분별이 기본적인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자들로서의 성숙함이 없는 것에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바른 주의 뜻하심의 합당한 성찬식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7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로움을 인하여서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교회의 모임에 편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을 지적함과 그런즉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함을 지적하는데 구체적인 이유로 그 고린도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는 자들로 시장한 사람과 취한 사람이 있고 먹고 마실 집이 없음이 아닌데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인데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 받은 성찬에 대한 것은 이를 행하여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임을 지적하면서 피로세운 언약으로써의 잔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으로써의 떡을 마시고 먹는 것을 행함에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음에 대한 것을 지적하면서 판단 받지 않는 자리에 서도록 하고 형제들이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도록 해서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도록 함을 말하고 있고 자신이 나아갈 때에 바르게 고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 고린도전서 11장 전체는 두 가지로 나누이게 되는데 하나는 전반적인 지난번 본문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함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 가운데서 남성과 여성의 각기 세워주신 질서라고 함의 사실이라고 하는 실제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 전통의 모습만 가지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찬이라고 함을 행하는 성도들로서 주의 양육을 받을 아이와 같은 자들로서 재창조의 질서에서의 모습에서 읽게 되어지는 가정의 아이들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오늘은 후자의 경우가 주목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의 존경과 순종이 있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신의 부모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주 안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친근함과 편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질서적인 차원에서 존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다면 구약에 엘리의 가정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가 가르친 사무엘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이 칭찬을 받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편당으로 나누어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서의 모습들로 비교되어질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은 자존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갈고리로 건져가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억지로 빼앗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하고 이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추행 성범법자가 되는데도 제사장 엘리는 말하기를 ‘어찌 하여 이런 일이 있느냐 소문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였다면 책망하는 것이 옳은 것인데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그 제사를 멸시하는 자의 모습과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은 십계명을 완전히 범한 자의 모습입니다.(삼상 2:12~24)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전사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며느리는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라는 이가봇으로 그 아들을 칭하고 쾌념치 않게 되며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4:17~22)

이러한 엘리의 가정과 고린도교회의 모습과 비교되어지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의식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편당이 있다고 하여서 여러 편당의 자의적 입장의 실리적 약삭빠름을 지향하다보니 먼저 먹고 나중에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드린 어린양의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세우신 언약을 위해 준비하고 바쳐진 것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엘리의 불량아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앞서 고린도교회에 음란이 있었던 것을 보면 과연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진정으로 주의 상위에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사사이며 제사장인 엘리의 부정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뜻하심을 따라서 그 제도속에서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자라며 그 가운데서 양육을 받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로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 질서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곳에서 양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말씀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주목할 때에는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에서 비로소 교회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치는 그 내용적 증거적 메시지가 먼저 그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러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증거자는 그 목이 꺾이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모습과 여러가지 비판되어질 수 있는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어진다고 하면 교회로서 인정하고 그곳에서 신앙생활함의 당연함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서 믿음으로 다른 질서를 찾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떠나는 것이라고 함과 그래도 그 지역교회의 정체성이 주의 말씀하신 바가 선포되어진다면 최종적 판단은 주께 맡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의 분량적 차이로 거취문제를 정한다고 하여도 그것의 여부로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라서 그 질서를 생각하지 않고 그 창조적 질서라고 하는 것을 읽지 못하는 가운데서 가능성만 따라서 실리적인 것만 따라서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단호한 책망을 하여야 하겠지만 자신을 보내셔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때에는 그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한가지 기억하게 되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언약의 표현과 증거로써의 성찬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그 앞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창조적 재 창조적 질서를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서 판단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엘리 제사장의 모습과 비교되어진다고 할 때에 달리 생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리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가능성에 따른 기준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창조적 재창조적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으로 재해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과 이것은 약속을 받지 못하는 세상의 안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인가'(출 5:1~2)라고 함을 말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서 출애굽을 이루셨던 것과 같이 세상은 자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려고 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려고 하며 그들이 의식함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악된 것으로 지배하는 사단의 악한 괘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기본적인 불량자로 나타나며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의모습'(삼상 2:12)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새언약의 증거로써의 한몸을 나타내는 주의 상의 성찬에 대한 정당함의 실재와 실제를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의 중심을 마음에 두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주의 상의 주의 성찬을 정당하게 합당하게 받지 못한 자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진정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한 표현으로써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나타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치유되어지는 사실들 정당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들이 진정한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의 세우신 교회가 이미 창조적 질서 가운데서 그 실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재창조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그로인한 지역교회의 질서를 정당하게 받아서 그 가운데서 주의 말씀의 사실을 따라서 생활하는 사무엘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심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질서를 임의적 가능성과 필요성에서 비로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재창조적 질서를 따라서 규정되어진 것임을 기억하고 그 사실이 임의적으로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진실한 것으로 알아서 그 질서를 말씀 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배우고 섬기시는 가운데 사무엘과 같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와 같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로서, 주의 상을 분별하며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로서, 주의 새로 새우신 언약과 주의 죽으심을 주의 오실 때까지 전하시는 자들로서, 하나님앞에서 받으신 바가 되시는 자리에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http://geocities.com/vosscare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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