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6월23일 소망교회 수요예배설교
행14:1-18
거짓 경건을 지나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인생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개연적인 가능성에 의미를 걸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선전문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선전이라는 말은 '주의나 주장, 사물의 존재, 효능 따위를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하도록 잘 설명하여 널리 알리는 일.'로써 납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납득적 사실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는 그 널리 알린다는 개념은 선동으로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여기(勵起)되어진 상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어떤 일을 위한 고무적인 상태를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어떤 일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나 실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써 여기되어진 상태와 그 상관성을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이 신앙적 열정이라고 함이 있어 행함이 있지만 분별적 실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선동적 개념만 있으므로 결국 거짓 경건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는 거짓된 경건의 자리에 이르는 위험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 주의하도록 하시며 말씀하시는 경건의 사실을 말씀하심에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이고니온이라는 즉 작은 형상이라는 이름의 가진 지역에서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함에 많은 이들이 믿음과 그를 시기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함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에 따라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행함으로 인해 두 사도가 도망을 치게 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8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았는데 사도 바울이 믿음이 있음을 주목하고 고쳐주었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그곳에서 바나바를 '쓰스' 바울을 '허메'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받아야 할 그 영광과 칭송을 그 거짓된 신들에게 돌리고 그 제사적 행위를 하려고 함에 있어서 사도들은 그것을 말려 말하여 그와 같은 것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열정이라고 함이 사실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며 바르게 증거하도록 권면하며 증거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의 객관적 납득할 수 있는 근거적인 입장이 됨을 말하는데 사람들의 합리적 개념의 납득만을 가지고 신적인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은 그 열정이라고 하는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거짓된 경건의 기본적인 실체가 되어짐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주목합니다.
좀더 주목해보면 유대인들이 선동함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두 사도 바나바와 사울이 증거한 내용을 이성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우격다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합리성만 가지고 하나님의 가르침의 권위라고 함을 부인하려고 하는 의도와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이 선동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도들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하는 구체성 있는 거짓된 경건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라는 개념만 말하고 그러한 것이 지향하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선동일 뿐이요 신앙윤리로써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거짓된 경건의 실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두 번째는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공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으로써 우상숭배적 정당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시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거짓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천지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철학자들은 창조주 조물주를 여러 신들 중에 하위에 한 신에 불과한 것과 같이 말하고 있으며 그를 믿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은 자기 정당함을 그러한 것, 상대적인 판단에서 입증되어지는 당위성에 메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의 하나님 그를 믿는 자들, 그 피조물들도 그의 형상을 따라서 자존심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며 그것의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존심 그것이 진정한 자존심의 실체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바로 이러한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이방의 많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자기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객관이라는 실체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따라서 그것을 의식해서 대용적 개념이나 그것에 눈을 감고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윤리적 동기의식의 여기(勵起)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것도 참된 경건을 말할 수 없는 거짓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해두겠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경건을 지나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증거적 사실을 말씀하심을 따라서 그 안에서 존재와 존재의식을 찾으며 기동하시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주의 영접함을 받은 자로서 서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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