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6월20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3:1-9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일반적으로 '모든'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정도면에서 한정되어지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의 기준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면 역시 모든 이라는 말도 임의적일 뿐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범위에서 어떤 한정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도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하는데,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그 정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질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식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심을 주목하며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때마침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답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한 해를 받음에 빌라도가 더 죄가 있는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더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과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6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써는 한 사람이 포도원에 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그 열매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음과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버림에 대한 것을 말함과 그 과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기를 구하고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리지 않으면 찍어버리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죄의 정도라는 것의 인식의 문제와 그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특히 문맥적인 차원에서는 시대적 분별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책망과 또한 더 나아가서 옳은 것을 어찌 스스로 판단치 않는가 라는 책망하심에 이어서 죄의 문제가 먼저 이어지고 있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2장 58장과 59장에서의 말씀에서는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를 말씀하시면서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결단코 나오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 상대적인 충족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면 율법적 판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두어 사람이 그 때 마침 와서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으로 정도면에서 납득되어지지 않는 자들의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판단하며 자신들의 상대적인 죄악이라고 함이 상대적으로도 그렇게 판단의 사실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상대적 죄에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좀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죄가 많아서 종교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간과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주의 전파하시는 것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시는 메시아의 증거라고 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죄도 죄 나름이지 회개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과 메시아의 증거적 권위라고 함도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즉 정도면에서도 간과할 수 있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진 자도 회개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에서는 시대의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악함의 시대 그리고 어둠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고 하면 그들의 존재는 부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이사야서 5장의 말씀하심 즉 포도원의 노래에 관한 말씀을 마음에 두시고 말씀하심으로 받게 됩니다. 즉 정도의 기준을 임의적인 스스로의 판단에서 말하고 있고 특히 '죄라고 하는 것을 절대의 재가와 상관없는 임의적 스스로 판단하고 있음에 있어서 그 화가 있음'(사 5:21)에 대한 것을 의식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의 손으로 행하심에 마음을 두지 않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임의적인 기준에서 한정시키고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그 불확실성의 세대 그 실제를 모르는 세대의 어두움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로부터의 존재와 삶의 정당함을 찾지 않는 불순종이 바로 죄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죄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나타내시게 하시는 은혜를 입은 정도의 차이로 상대적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여지도 같이 있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상대적인 것으로써 절대자의 자존적 정당함에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이라고 함을 정당함을 세울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또한 죄악인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하심에서 피조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지 않는 자는 그 상대적 선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 상대적 선함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상실하는 가운데서 죄인이라고 함의 실재와 실제적 판단은 정당한 것이라고 함을 합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구별이 전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회개할 죄인이며 또한 각자가 범하게 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들도 죄악의 개체적인 실제가 되어진다는 사실은 전혀 합당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실들도 역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사실로써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함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써 인해서 그 회개하라는 말에 의미와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비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윤리적 잘못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전혀 실제적인 것을 말하면서 오히려 정죄하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것은 그 규범적 정도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을 자존하시는 절대자의 자기 정당함에 두지 못하고 상대적인 자기 정당함을 말하고 있는 악함이며 그것이 눈을 멀개하며 귀를 막으며 강팍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의 절대자 우리 하나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이라고 함에서 우리의 존재의 정당함을 믿음으로 찾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구원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상대적 죄에 대한 인식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은 자기 기만으로써의 심판의 실제의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 주님이 구주이심을 증거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음에 대한 증거자들이 됨이 합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포도원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받드는 가운데서 주의 복음의 합당한 증거자들로써 주의 칭찬의 자리에 서게 되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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