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6월13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49-59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제목을 선정하면서 많이 고민되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시대를 분별하라 또는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사실 지난날 분별없는 극단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적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형태적 차이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할 수 있으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들과 전혀 다른 측면의 말을 하는 가운데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언급해야 함의 당위성으로 다시 시대를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심이 주님의 증거적 내용임을 놓고 종으로서의 증거를 하게 됩니다.
한 때, 정치적 언어로써 '뜨거운 감자'라는 표현과 같이 논쟁적인 측면에서의 '화두'라는 말과 같이 종말에 대한 것에 대한 논쟁은 종말에 때에 사실이냐 아니냐 라는 그 문제로 믿음의 선한 싸움의 정체성을 놓고 또한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이 다툼을 하게 되어지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본문의 내용적 증거로서의 말씀을 주목하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49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화평이라고 함의 개념적 실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형태적 개념에서의 실제를 말한다고 할 때에는 불을 던지러 온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며 또한 분쟁케 되어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54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기상의 날씨적인 것은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과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함에 대한 책망하심과 그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고소하는 자와 동행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완전함에 대한 충족성을 말하지 못함에 결박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본문의 문맥적 흐름과 그 가운데서의 오늘 본문의 증거라고 함의 분별이 요구되어지는 합당함이 그것입니다. 즉 그 분쟁의 사실적 근거 즉 실제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시대를 분별함이라고 함의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의 실재를 말할 수 있는 여부에 대하여서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견에 옳다고 말하는 주관들을 승인시키는 가운데서 사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그러한 소득을 자신을 위하여 채우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사회의 가치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승인되어진 것은 보편적인 그 때의 상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것에서 어떻게 절대에 대하여서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서 말할 수도 없고 또한 증거할 수도 없으며 또한 반론할 수도 없는 불가지적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 느껴지는 사실로서의 것을 공론적으로 실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주님의 당시에서도 마찬가지 인식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자기를 상대적으로 말씀하시며 알게 하신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주님이 세상의 존재의 실재에 사실화시키실 때에는 그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사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존재의 실재를 말할 수 있게 하심에 있어서 그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구원자이시며 그 실재의 사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실재를 분별하는 빛에 비교되어지는 가운데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재가가 없는 가운데서는 형태적인 측면의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 실재를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의 받아들이기 나름대로 가치관의 성립이 되어지기 때문에 전달적 의미와 방법적 의미와 그것의 기득권적인 입장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주의 가르침의 실재도 현상적인 상대적 형태를 현실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다툼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절대자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선이라는 개념의 실제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선한 다툼은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써 합당함의 실제를 또한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실함의 증거자들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심의 뜻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세대를 분별하지 못함에 대한 책망은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적 입장의 증거자로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합당한 증인의 모습과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나 상대적인 것을 의지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충족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온전함을 바라는 도덕주의자들 경건주의자들의 받을 고통과 심판하심에 대한 것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덕주의자들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형태적인 측면에서 신앙의 경건이 도덕적 일반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 동일시되어지거나 또는 인위적이라는 실재적 기반과 동일시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이라고 함은 도덕주의적 개념의 이상적 구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것에서 그 신실함에서 그의 상대적 표현의 실재와 실제성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별을 통해서 가능해지는데 그러한 것이 무엇인 실재인가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마치 어두움이라고 함에서 분별하게 해주는 빛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의 실재를 말씀하시며 존재의 정당함과 그러한 실재들의 사실 즉 실제성을 분별하게 하시는 구주이시며 빛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아느냐라는 불가지적 입장의 혼돈이라는 어둠에서, 참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예수께서 진정한 구주이시며 인생의,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는 실제적인 믿음의 증거의 다툼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선한 증거자들로서의 다툼과 증거로써 주의 택한 백성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뜻하심을 잘 받드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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