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6월 07, 2004

인자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

2004년6월6일 소망교회 주일낮예배설교
눅12:35-48
인자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

항구 부둣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또는 어떤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또는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여심(女心)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참 아름다울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한 말과 판단에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는 다르면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의 기원적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주의 증거라고 함을 주목하며 특히 주의 종들의 모습 주의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과 그것을 향한 종들의 마음이 어떠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심을 봅니다. 이에 따라서 주의 성도들로서 종 된 자의 모습에 대한 주의 증거를 나타내며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성과 내용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과 본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으로 나누어짐을 봅니다.

첫 번째 본문의 말씀인 35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혼인집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열어줄 수 있도록 깨어 있으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본문의 말씀인 41절에서 48절까지의 말씀에서는 베드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하심의 말씀인데 이러한 깨어있는 종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씀하심은 베드로의 질문과 같이 주님과 함께한 그 때 당시에 제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입니까 라는 질문과 주님의 부르신 자의 중심이 그러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심의 말씀하심의 내용은 생각지 않은 날 주인이 이르심에 따라 신실치 않은 종들이 엄히 맞을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고 있으시고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에 대한 말씀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를 기다리는 성도된 자들의 종 된 자로써 깨어있음과 근신함에 대한 그 중심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하심의 재해석적인 측면, 또는 그 담겨진 주의 뜻하심에 대한 기술적 표현과 증거이심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문맥을 주목해 볼 때에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하심과 같이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물질에 의해 현실적인 실제의 판단을 받는 생활양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본질적인 실제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으로 물질적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부요하지 못하는 그러한 시험의 때를 지나는 인생이라고 하는 모습의 정황 속에서 받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허리를 다치면 어떤 힘을 사용하기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허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어지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그 신앙적인 생활을 위한 신앙 윤리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을 세삼 새롭게 하려고함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로 띠를 띠라’(엡 6:14)고 하신 에베소서의 말씀하심이 이 주의 말씀하심에서 비롯되어진 하나님자신의 재차적인 동일한 말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진리로 띠를 띠라고 하심’은 등불을 켜고 서 있게 되어지는 근신함에서 주목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의식을 위한 분별과 그 실제의 주의 말씀하심을 증거하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켠다는 것은 사물의 실제상황을 말하고 알려주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같이 생각하고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것에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암흑과 같이 나타나고 있고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도 진정한 하나님 자신인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그러한 말로 주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표현 즉, 우리들의 인식의 범위적인 실제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에 그 ‘예수님이 바로 실제의 진리가 되어지며 하나님 자신이심’이 절대자 자신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이 구원이심을 말씀하심이 현실에서 진정한 사실이며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사실임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등불을 밝혀 비추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이 확실하냐는 것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는 등불을 켜고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며 등불을 주 예수 안에서 켤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모습은 진정 그 신앙의 동기가 진리로써 부여되어진 실제의 사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신실한 종의 모습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다는 말은 무엇이 실제인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따른 그 실제의 그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중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한 논리 정연한 표현을 못하고 있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진정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참된 신이심을 믿고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로서 받는 자는 깨여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을 또한 살면서 주님을 증거하였다면 그도 역시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지며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질문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은 베드로는 자신의 특정한 모임만이 주의 말씀을 맏을 수 있는 현실적인 실제의 모습이라고 한정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양식을 때를 따라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는 말씀을 하심에 있어서는 그러한 양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지는 자들 비록 주관적이면서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재가적인 차원의 실재적인 믿음의 소명이 있게 되어지는 자들의 모습에서 주의 성도들 주의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받을 바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있는 믿음은 자기 스스로 행함이라고 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임의적인 순전히 그 믿음을 가진 자의 주관이라고 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주관적 형식이면서도 그 정당함을 찾는 자들은 그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모든 신앙적인 힘의 허리를 동이게 되어지는 제한받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신앙에서 행함만 생각하고 그것의 강조만 생각하고 있는 자의 모습은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라는 그 허리에 띠를 묶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행함의 여지를 남겨두고 정도껏 충성하고 때를 따라서는 자기의 소유를 위해 자기의 것을 챙기는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에 소욕이라고 함의 띠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윤리의 동기라고 하는 것이 자기 편의로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에서 실제적인 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이라고 함에서 주님의 오시지 않음에 따라 종들을 때리고 주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수입적인 개념에 착념하며 그것을 위해 반대하는 종들에게 실제적인 자신의 현실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핍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주목하게 되어지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주의 뜻하심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의 심판이 있게 되어짐을 증거함에 많은 선지자들은 너에게만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느냐는 뺨을 쳤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제라는 자신들의 예루살렘에서의 기득권이라고 함에서 해석되어진 그들의 행동이었음을 볼 때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하나님 자신으로서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면서 만인이 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신부되어진 교회 주의 택한 백성들이 주님을 맞이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이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는 여심이라고 함을 말했던 것이며 이러한 의식들이 바로 주의 오심이라고 하는 것의 일반적인 측면에서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지고 잇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은혜로 일을 하게 되어지는 종들의 모습이면서도 주 앞에서 상대적인 분별력이 허락되어질 때에 한 일이 너무 없어서 종아리를 걷는 자의 모습으로 좀더 잘하려고 노력하여야 함에 당위성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마저도 주님의 주권적 판단에 있으니 우리 성도들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현실적 실제의식의 강요를 벗어나서 주의 말씀이 진리이며 진정한 사실임에 대한 증거를 잘 감당하시는 가운데 우리와 늘 동행하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혀 낯설지 않는 모습으로 기쁨으로 맞이하시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함께하시는 성도님들과 소망교회 위에 있으시기를 주 예수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Preacher's main weblog
http://sophiadei.blogspot.com